항목 ID | GC04800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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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人文地理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해경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개설]
강남구는 현재 서울특별시 남부 지역의 사회·문화·산업·행정·교통·관광의 중심지이다. 1960년대의 서울특별시는 경제 발전과 인구 팽창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이에 1963년 광주군에 속했던 강남 일대를 주상복합 전원도시의 개발을 목표로 하여 성동구에 편입하였다. 강남 지역은 개발 붐을 바탕으로 더욱 인구가 증가하였고, 1975년에는 성동구로부터 분구하여 강남구로 독립하였다. 여러 번의 행정 구역 개편 후 1995년 1월 11일 15개 동[신사동·논현동·압구정동·청담동·삼성동·대치동·역삼동·도곡동·개포동·포이동·일원동·수서동·세곡동·자곡동·율현동]으로 확정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남구의 북쪽 경계선은 한강이며, 이를 경계로 하여 성동구의 금호동·옥수동·성수동과 용산구의 한남동과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탄천을 경계로 송파구의 잠실동·삼전동·가락동·문정동 등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서초구의 잠원동·반포동·서초동·양재동 등과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구룡산과 대모산을 경계로 서초구의 염곡동과 내곡동 및 경기도 성남시의 복정동과 신촌동에 접하고 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와 이어진 한남대교를 비롯하여 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청담대교 등의 강남구의 북쪽에서 한강을 가로질러 있어 강북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고 있다.
[역사]
1. 고대
강남구 일대는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반도 선사문화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강남구 일대는 산과 평야가 발달한 천연의 지형으로 생활의 터전을 삼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역삼동·율현동·압구정동 등에는 한반도의 대표적 선사유적이 곳곳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2. 통일 신라 이전
고대에는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인 진국(辰國)이 있었으며, 이후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 연맹체가 등장하였다. 백제 시대의 강남구 일대는 낙랑 지역과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낙랑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정치세력의 성장 속에서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 이후 강남구 일대는 각종 자원과 지리적 이점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의 토성인 삼성리 산성이 강남구 삼성동에 있었다고 하나 도시화로 인해서 멸실되었다.
3.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강남구 일대는 광주부(廣州府)에 속해 있었다. 23개 면을 포함하고 있었던 광주부는 조선 시대 중기까지 경기도 내 가장 큰 고을이었다. 더불어 군사기지로 주목받았으며, 이때 남한산성은 중요 방어선이 되어 전란 때마다 격전지가 되었다. 주민은 주로 한강변에서 농업 위주의 경제활동을 하였으며, 일부는 고기잡이를 하기도 하였다. 장시로는 사평장(沙平場)이 열렸는데, 송파장(松坡場)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조선 시대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광주목을 서술하고 있으나, 강남구가 속한 언주면과 대왕면의 기록은 적었다. 다만 영조(英祖) 35년(1759)의 호구장부에서 광주부 언주면의 12개 리, 대왕면의 17개 리가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된다.
4. 근대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0년도에는 구한말의 지방행정제도와 행정구역을 답습하여 12개의 부(府)와 137개의 군(郡)을 유지하였으며, 강남 지역은 광주군과 과천군에 해당하였다. 1925년도 강남과 서초 지역의 인구는 약 2만 여명으로 당시 한반도 농촌지역의 평균이었다. 해방 이후인 1963년에는 서울시의 급격한 행정구역 확장이 있었다. 이때 강남구는 영동 1·2구획 정리 사업을 통해 현재의 공간구조를 이루었다.
[행정구역]
강남구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과 광주군(廣州郡) 일부를 모체로 한다. 1759년(영조 35)의 호구장부에서 광주부는 23개 면(面)과 113개 리(理)로 구획되었다. 그 중 언주면(彦州面) 12개 리와 대왕면(大旺面) 17개 리가 현재 강남구에 해당된다. 강남구의 서부는 원래 경기도 과천군에 속하였다가 1913년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新東面)이 되었고, 동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다. 국도 393호인 말죽거리 길을 경계로 신동면과 언주면의 사무소가 있었다.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이들 지역이 서울에 편입되었고, 신동출장소와 언주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에는 잠원동·서초동·양재동 등이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이관되는 동시에 신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언주출장소는 송파출장소와 합하여 영동출장소로 바뀌었다. 1975년 10월에 이르러 성동구에서 분리되어 강남구가 신설되었는데, 이때 성동구 관할 중에서 한강 이남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1979년 10월에는 대체로 탄천의 동쪽 지역인 천호출장소 관할지역이 강동구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에는 관악구 방배동 일원과 동작동·사당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2012년 현재 법정동 15개와 행정동 26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인구]
강남구의 인구는 2003년 이후 계속 증가세를 보이며, 2010년 현재 577,710명 중 남자 260,868명, 여자 316,842명이다. 남녀의 비율 변화는 남자가 1995년 49.6%에서 2010년 45.1%로 감소하였다. 인구의 구성을 보면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65세 이상의 인구가 1995년 24,483명이었다가 2010년 44,229명으로 55% 증가하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인구의 노후화가 급격히 진행됨을 보여준다. 타 구와의 인구 이동은 2007년에는 전출이 다소 높았으나, 2009년도에는 전입과 전출이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주변 시도별 이동은 전입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서 타 지역에서 강남구로의 전입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
강남구는 서울특별시 25개 구 중 서울시 동남부 한강 남안에 위치한다. 강남구의 북쪽 경계선은 한강이며, 남쪽은 구룡산과 대모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한강에는 강북과 이어주는 한남대교·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청담대교가 있다.
강남구는 서울특별시 최초의 계획도시답게 잘 조성된 격자형 도로에는 138개의 노선버스와 서울도시철도 2호선·3호선·7호선·9호선과 분당선 5개 노선이 관통하여 접근성이 용이하다. 강남구 삼성동 한국도심공항터미널은 인천공항까지 연결하는 교통의 결절지이며, 서울도시철도 9호선을 통해서 김포공항까지 약 30분이 소요된다. 강남구의 교통의 중심인 테헤란로와 영동대로에는 금융·호텔·로펌·대형 오피스 빌딩·무역협회·COEX 등 비즈니스 하기에 편리한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
[산업]
강남구의 도로망은 다른 구에 비하여 각 거리별 특성이 두드러진다. 테헤란로 주변은 한국종합무역센터·한국도심공항터미널·ASEM센터가 위치하여 무역·금융·벤처·첨단산업이 발달하였다. 압구정동·청담동 지역은 패션·예술·영상·애니메이션·유통, 그리고 삼성동·논현동 일대는 화랑·도예·가구 업종이 특화되어 있다. 최근에는 포이동 일대가 벤처기업 단지로 급부상하는 등 권역별로 균형있는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 주민 대다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고급 빌라 등의 공동주택에 거주하며, 대형 백화점·문화시설·녹지 등이 풍부하여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편의성을 높혀주고 있다.
강남구의 사업체 수는 2008년 52,288개로 전년 대비 2.1%가 감소하였다. 이중 도매 및 소매업·제조업·건설업·부동산업 및 임대업은 감소추세이며, 전문 과학 및 기술서비스업·협회 및 단체 개인서비스업·숙박 및 음식점업은 증가추세이다. 이를 산업체별 종사자로 보면 2008년 585,813명으로 전년 대비 0.2% 증가하였다. 이중 도매 및 소매업이 110,338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문 과학 및 기술서비스업이 94,856명으로 그 다음을 차지하며, 전년 대비 14.9%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의 경우 2007년도 24,162개에서 2008년도 15,631개로 35.3%의 뚜렷한 감소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시 강남구의 특성상 도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농업·임업·광업 종사자는 234명으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며, 이마저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관광]
강남구 관광자원의 특성은 전통과 첨단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텔 30여 개와 코엑스 등 대형 쇼핑몰·백화점과 청담동 명품거리는 국내 최고의 쇼핑 관광 인프라이다. 테헤란로에는 삼성·포스코 등 글로벌 기업 사옥과 첨단 IT기업이 입주하여 글로벌 시티라는 첨단 서울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더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선정릉을 비롯하여 봉은사·풀무원 김치박물관·코리아나 화장박물관 등은 강남구의 전통과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문화 관광자원은 다음과 같다. 광평대군 묘역(廣平大君墓域)은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大母山)에 입지하고 있으며, 700여기의 종문 묘소와 종가재실이 아름다운 장소이다. 봉은사(奉恩寺)는 녹음이 풍부한 도심형 사찰이며, 문화재인 선불당(選佛堂)·홍무 25년 장흥사 명동종(洪武二十五年 長興寺 銘銅鐘)·봉은사 김정희 서 판전 현판(奉恩寺 金正喜 書 板殿 懸板)·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수소연의 초판이 있다.
최근 강남구는 첨단산업과 패션 등 볼거리가 풍부한 장점과 강북과 차별화된 고급화 전략, 한류 스타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마케팅, 의료 관광, VIP 관광 등 적극적인 관광객 유치 기법 개발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강남구는 의료관광전담팀을 구성하여 관광객 유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명 연예인이 즐겨 찾는 미용·성형 분야 의료기관이 집중된 점을 활용하여 ‘미용·성형 의료관광의 메카’로 브랜드 이미지를 견고히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강남구 관광산업의 특징은 체험을 동반한 관광 패턴으로 패션 축제와 도시형 사찰에서 진행되는 템플라이프가 대표적이다. 패션의 유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강남 청담~압구정 패션특구’에서는 ‘강남패션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봉은사에서는 매주 목요일 영어로 진행하는 사찰 체험프로그램인 템플라이프를 진행하여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민속]
강남구 일대는 빠른 도시화로 전해내려 오는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들이 사라졌다. 동제(洞祭)는 지역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신 치성지(致誠地)에서 마을의 편안함과 소원성취를 비는 제를 하늘과 산천에 지내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관행으로 인근 주민들 간의 공동체적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 강남구 일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제로 대표적인 것은 압구정 도당·매봉산 동제당·삼성동 충열화주당·도곡동 느티나무 당제·대치동 은행나무와 영산단·역삼동의 방아다리 제당 등이다.
압구정 도당은 강남구 신사동 364-2 근방으로 신목(神木)이자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조선 시대 세조 때에는 원단(圓壇)을 모아 하늘에 제사지낸 곳으로 역사가 깊다. 그러나 제3한강교가 조성되면서 당집은 헐리고 주민들이 떠나게 되어 도당굿은 보존되지 못했다. 매봉산 동제당은 도곡 1동 매봉산 산정에 있으며, 신목은 없다. 주변은 한강 하류에 위치하여 매년 홍수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전염병이 문제가 되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산신께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었다. 이러한 당제는 현재에도 이어져 내려와 매년 10월 제를 지낸다. 삼성동 충열화주당은 강남구 삼성동 155-3에 있으며, 신목인 느티나무가 남아있다. 과거에는 무당이 화상을 보관하고 당제를 지내던 3칸 내외의 기와 당집이 있었다. 1982년 주변 지역의 개발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도곡동 느티나무 당제는 강남구 도곡동 산 177에서 열리며, 느티나무는 시 지정 보호수로 신목이 신체(神體)이다. 매년 10월 1일 질병 퇴치와 풍년, 마을의 많은 경사를 기원하는 도당제를 지낸다. 대치동 은행나무 동제는 강남구 대치동 975-8에서 열리며, 시 지정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영산단(靈散壇)이 있다. 은행나무는 과거 구마을 시절 한 할머니가 용문산으로 치성을 드리고 오던 중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현재의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구마을 사람들은 7월 첫날 은행나무 앞에서 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역삼동의 방아다리 제당은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39 근방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남쪽 앞산 중턱으로 노송나무 숲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매년 아랫방아다리·윗방아다리 주민이 몇일 밤낮에 걸쳐 지낸 산신제가 1970년대까지 전승되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나무가 벌목되자 동제사의 모습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