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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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道峯記-申命顯-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76년 - 「유도봉기」 저자 신명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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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00년 - 「유도봉기」[신명현] 저술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20년 - 「유도봉기」 저자 신명현 사망 |
배경 지역 |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기문 |
작가 | 신명현 |
[정의]
1800년 4월 신명현이 도봉산을 유람하고 나서 지은 기문.
[개설]
「유도봉기(遊道峯記)」는 1800년(순조 즉위) 4월에 신명현(申命顯)[1776~1820]이 도봉산(道峯山)을 유람하고 느낀 감흥을 적은 기문(記文)이다. 「유도봉기」는 신명현의 시문집 『평호유고(萍湖遺稿)』 권 하(下)에 수록되어 있다. 신명현의 자는 유목(幼穆)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문집에 북한산(北漢山), 도봉산 등을 유람하고 쓴 시문이 적지 않은 점과,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서 백악산(白嶽山)과 종남산(終南山) 등을 유람했다는 그 자신의 진술로 보아 유람을 즐겼던 듯하다. 문집으로 『평호유고』가 전한다.
[구성]
1800년 4월 15일에 죽치관(竹峙館)을 출발하여 소동문(小東門)→ 수유점(水踰店)→ 쌍갈문(雙葛門)→ 도봉동문(道峯洞門)→ 도봉 서원(道峯書院)→ 소광정(昭曠亭)→ 옥천암(玉泉菴)→ 망월암(望月庵) 등의 여정으로 유람하였다. 16일에는 부왕사(扶旺寺)에 이르렀다가 3일째 되는 날 승가사(僧伽寺)로부터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 이 글에서는 도봉 서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도봉 서원의 배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3일 간의 여정 가운데 거의가 첫째 날의 여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용]
도봉산의 지정학적 위치와 도봉 서원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도성에서 동북쪽으로 12㎞[30리] 거리에 산이 있으니 ‘도봉(道峯)’이라 하는데, 신묘하고 웅장하며 높고 기이한 것이 기내(畿內)의 명산 가운데 으뜸이라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칭했다 하였다. 그 아래에 사우(祠宇)가 있으니 곧 정암(靜庵)과 우암(尤庵) 두 선생을 모신 것인데 그 사이에 여러 현인들의 진적(眞蹟)이 있다고 하고, 한번 이곳에 노닐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경신년(1800) 4월 정유일, 벗들과 약속하고 새벽에 죽치관을 출발하여 소동문을 나가 수유점에 이르러 조금 쉬다가 쌍갈문을 지나 산 아래에 당도하였다는 등의 여정을 기술하고 있다. 골짜기로 들어가니 큰 바위에 ‘도봉동문’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보였으며, 서원에 당도하여 사당에 배알하였다 하고 서원의 배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당(堂) 위에 걸린 영조(英祖)의 어필 ‘도봉 서원’이라는 글씨에 대해 언급하고 북벽(北壁)에 걸린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 시는 곧 송시열의 「도봉 서원에 쓰다」로 원제는 「제도봉서원(題道峯書院)」인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창애삭립동문개(蒼崖削立洞門開)[푸른 절벽은 깎아 세운 듯 동구가 열리었고]
간수잔원기곡회(澗水潺湲幾曲廻)[시냇물 잔잔히 흘러 몇 번이 굽이치네]
요순군민당세지(堯舜君民當世志)[요순시대 군민(君民) 당시의 뜻을]
묘전공유후인래(廟前空有後人來)[사당 앞에 후인들이 와서 기리네]
이어서 서쪽의 영귀문(咏歸門)을 나서서 경치를 감상하고, 소광정으로 가는 도중에 목격한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송시열이 쓴 주자(朱子)의 시구 “제월광풍경별전 료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권상하(權尙夏)가 쓴 “무우대(舞雩臺)”, 그 옆에 송준길(宋浚吉)이 쓴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 등의 글씨가 그것이다. 소광정에서 노닐다가 옥천암으로 가 옥천암 뒤편으로 보이는 만장봉(萬丈峰)의 광경, 짹짹거리며 날아가는 새들, 망월암 방면의 경치 등에 대해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튿날과 사흗날에 대해서는 “다음날 북성(北城)의 여러 사찰을 두루 보고 부왕사에서 자고, 제3일에는 승가사에서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라 하여 매우 짧게 언급하고 있다.
[특징]
「유도봉기」는 유기문(遊記文)의 서술 체계를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3일 간의 여정 가운데 첫째 날의 여정에 대해서만 자세히 기술하고 나머지 여정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애초에는 3일에 걸친 여정을 균형 있게 서술하고자 하였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첫째 날의 기록만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유도봉기」는 광경에 대한 서정적 묘사가 잘 이루어져 있는데, 가령 고즈넉한 옥천암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가운데, “양삼서골 책책비명이이(兩三棲鶻 磔磔飛鳴而已)[두세 마리의 깃들어 있던 산비둘기가 짹짹거리고 울며 날아갈 뿐이었다].”라는 서술 등을 통해 작자가 이 글을 쓰면서 특히 분위기 묘사에 주안점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유도봉기」는 도봉 서원의 배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기존에 율곡(栗谷) 등의 글을 통해 도봉 서원의 배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글은 답사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19세기 초반 도봉 서원의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도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