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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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三角山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64년 - 「유삼각산기」 저자 이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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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03년 - 「유삼각산기」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5년 - 「유삼각산기」 저자 이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8년 - 「유삼각산기」가 수록된 『월사집』 간행 |
배경 지역 | 삼각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
성격 | 기문 |
작가 | 이정구 |
[정의]
1603년 9월 15일부터 이틀간 이정구가 신응구·박호 등과 삼각산을 노닐고 와서 쓴 기문.
[개설]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는 1603년 8월 금강산에 다녀온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산수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가 문득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의 승려 성민(性敏)의 편지를 받고 삼각산 유람을 기획하여 1603년 9월 15일부터 16일까지 신응구(申應榘)[1553~1623] 등과 동행하여 유람을 떠나 이튿날 밤까지 이어진 여정을 기록한 유기문(遊記文)이다. 삼각산은 흔히 북한산으로 불리며, 서울특별시 북부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지척에 있으며, 현재는 북한산 국립 공원으로 통합, 관리되고 있다. 「유삼각산기」는 이정구의 시문집 『월사집(月沙集)』 권38에 수록되어 있다.
이정구의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문인으로,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병조 판서·예조 판서와 우의정·좌의정·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중국어에 능하여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활약하기도 하였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실천하여 정통적인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결과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 등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로 칭해졌다. 문집으로는 『월사집』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구성]
「유삼각산기」는 삼각산에 유람하게 된 계기, 동행인에 대한 정보, 홍제교→ 중흥사→ 산영루(山暎樓)→ 향옥탄(響玉灘)→ 노적봉→ 중흥동(重興洞) 등의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당시 악기를 잘 연주하던 이들에 대한 언급이 있어 주목된다.
[내용]
1603년 8월, 이정구가 금강산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금강산으로부터 돌아온 뒤 마음이 쓸쓸하고 즐겁지 않아 사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흥사의 노승 성민의 사미승 천민(天敏)이 찾아와 이정구에게 편지를 전한다. 편지는 성민이 쓴 것으로, 삼각산에 단풍이 짙어 며칠이 지나면 다 시들 것이니 오려거든 시기를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금강산을 그리워하던 차에 이러한 편지를 받은 이정구는 곧바로 행장을 꾸리고 있었는데, 마침 신응구로부터 편지가 와서 답장을 하며 함께 갈 뜻이 있으면 홍제교 사이에서 기다릴 것이며, 가능하다면 피리를 잘 부는 억량(億良)이라는 이도 데리고 갔으면 하는 뜻을 전한다. 하지만 본래 약속한 것이 아니어서 신응구가 동행할 것이라는 것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이웃에 살던 계성도정(桂城都正) 자제(子齊)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따라나섰고, 생질(甥姪) 대건(大健) 박호(朴箎)[1567~1592]도 따라나서니 이때가 계묘년(1603년) 9월 15일이었다.
천민이 길을 안내하였고, 이정구와 자제가 각각 술을 두 동이씩 가지고 갔으며, 말 한 필과 노비 한 명만 데리고 갔다. 길을 가던 도중 퉁소 명인 이산수(李山守)를 불렀으나 그가 집에 없어 실망하고 홍제교에 도착하여 보니 신응구도 와 있지 않아 다시 실망하였다. 중흥동 석문에 도착했는데, 신응구가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었다. 서둘러 민지암(閔漬巖)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였는데 계곡 사이로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퉁소 명인 억량이었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 후에 절에서 만나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절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성민과 여러 중들이 일행을 맞이하면서 월대(月臺)에 앉으라고 하였다. 자제는 갈증이 심했는지 술 한 주발을 들이키면서 작자에게 권했다. 갑자기 먼 곳의 퉁소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한 사람이 절을 하기에 보았더니 억량이었다. 어떻게 빠져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수행원의 말을 듣고 감히 늦을 수 없어서 배가 아픈 것을 핑계로 둘러대고 샛길로 왔다고 하였다. 일행은 박수를 치며 기뻐하며 퉁소 한 곡을 불도록 명하고 상으로 큰 술잔을 내렸다. 깊은 밤에 승방(僧房)에 모여 등불을 켜고 누워서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산영루 옛터와 향옥탄을 둘러보았는데 단풍이 붉은 물감을 들인 듯하고, 푸른 소나무와 노란 국화가 계곡에서 자태를 뽐내니, 참으로 비단을 펼친 듯했다. 승려에게 백운대 가는 길을 물으니 임진왜란 이후 오가는 사람이 없어 길이 끊어져 승려들조차 한 번도 백운대에 가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에 이정구가 신응구에게 한번 가 보자고 하니 신응구는 자신이 노쇠하여 험한 봉우리를 못 올라갈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정구가 박대건과 함께 노적봉으로 향하자 신응구도 따라 나섰다.
노적봉 정상은 겨우 10여 명이 앉을 수 있었고, 아득해서 내려다 볼 수가 없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노적봉에서 서해와 수락산, 아차산, 관악산, 청계산 등을 바라보고 한강과 도성을 내려다보았다. 술로 목을 축이고 취해 이정구는 노래를 부르고 자제가 춤을 추었으며, 퉁소 소리가 바람을 타고 구름 사이로 퍼져 나가 황홀한 꿈과 같았다. 절로 돌아가 밥을 먹고 쉬다가 악사 이용수(李龍壽)의 문하생을 만나 계곡을 따라 가다가 거문고를 안고 있는 이용수를 만났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술을 마시며 거문고 소리에 취해 노닐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특징]
「유삼각산기」는 한문 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정구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인 바, 네 글자를 반복적으로 운용하여 리듬감을 형성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그러한 정형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는 글자 운용의 묘(妙)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중간 중간에 의론(議論)의 내용을 삽입한 전대(前代)의 산수유기와는 달리 「유삼각산기」는 유람의 여정, 즉 서사에 충실한 서술을 보이고 있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유삼각산기」는 17세기 전반기 사대부가 어떤 양상으로 산수를 유람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간소한 차림과 단출한 행차, 그리고 산수 유람 도중에 악공들을 대동하여 음악을 즐기는 풍경으로 보아 이 시기 악공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양반 사대부의 산수 유람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 당시 억량이나 이용수, 이산수 등과 같은 이들이 악기를 잘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로 허균(許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의하면 피리와 현금(玄琴)에 능한 허억봉(許億鳳), 거문고를 잘하는 박소로(朴召老), 속조(俗調)에 뛰어났던 홍장근(洪長根), 가야금에 능했던 이용수, 비파를 잘 탔던 이한(李漢), 아쟁 연주에 능했던 박막동(朴莫同) 등이 당시 일류로 칭해지던 악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