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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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峯紀遊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58년 - 「도봉기유」 저자 김창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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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08년 - 「도봉기유」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21년 - 「도봉기유」 저자 김창업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98년 - 「도봉기유」가 수록된 『노가재집』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창업 |
[정의]
1708년 김창업이 도봉산을 유람하고 지은 오언 배율의 한시.
[개설]
「도봉기유(道峯紀遊)」는 1708년(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도봉산을 노닌 것에 대하여 지은 기행 한시이다.
김창업의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였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넷째 아들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김창흡(金昌翕)[1653~1722]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金萬重)[1637~1692]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68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즉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인근에 은거하였다. 1712년 연행 정사(燕行正使)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와 『가재 연행록(稼齋燕行錄)』을 남겼다. 김창업은 특히 자신의 은거지인 동교송계를 ‘동장(東庄)’이라 칭하며 그곳에 머물면서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을 한시로 썼다.
「도봉기유」는 김창업의 시문집 『노가재집(老稼齋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도봉기유」는 총 78구로 구성된 오언 배율로 도봉산에 오르는 여정, 즉 김창업의 우거지(寓居地)였던 동장(東庄)에서 출발하여 만장봉(萬丈峰)에 이르렀다가 도봉 서원까지 길을 따라 저자가 목격한 풍경을 주로 읊고 있다.
[내용]
김창업이 머물러 지내던 동장에서 아침저녁으로 도봉산을 바라만 보다가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도봉산 유람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략 동장→ 만장봉→ 도봉 서원 등의 여정을 따라 지나는 곳마다 보고 들은 바를 읊고 있는데, 인가(人家)의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 봄 숲이나 복사꽃, 자신을 위해 조카가 먼저 와서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것 등 소소한 일상의 일들을 중심으로 읊고 있다.
[특징]
짝수 구절의 끝 글자인 봉(峯), 공(筇), 송(松), 종(從), 종(淙), 용(茸), 중(重), 농(穠), 종(縱), 봉(逢), 용(容), 용(蓉), 종(樅), 종(宗), 공(恭), 용(舂), 종(蹤), 봉(鋒), 봉(封), 용(慵), 봉(丰), 용(庸), 종(鍾), 옹(雍), 옹(饔), 용(龍), 종(悰), 용(溶), 농(濃), 봉(縫), 종(鐘), 공(供), 용(墉), 동(冬), 용(傭), 흉(胸), 농(儂), 옹(顒), 농(農)을 운자로 써서 평성 동운(冬韻)으로 압운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창업은 학문이나 시문에 특별히 뜻을 두지는 않고, 주로 그의 동장에서 은거하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시에서도 특별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일상의 소소한 것을 소재로 삼아 시작(詩作)에 임했다. 「도봉기유」는 도봉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시이지만 경치의 묘사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도봉산 유람 도중 시인이 목격한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을 읊고 있어 그의 전반적인 문학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