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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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욱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 교통 및 숙박 시설.
[개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은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속해 있었고, 해등촌면이 도봉구의 전신에 해당한다. 해등촌면에는 조선 시대 도로망에서 역(驛)과 함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원(院)으로 누원이 있었다.
[설치 목적]
원은 주로 역과 역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주로 공무상 여행 중인 관원과 지방 수령이 여정에서 숙박할 수 있는 시설로 이용되었다. 그 외에 일반민도 이용할 수 있었으나,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였다. 공무를 띤 관원과 수령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으나 숙박에 한정되었고 연음(宴飮) 등은 금지되어 있었다.
[설치의 계기]
원은 고려 시대에도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원은 태조 원년 도평의사사에서 상소하여 설치되었다. 원우(院宇)[원의 건물]는 사찰이나 개인의 누정(樓亭) 등을 개조한 것도 있었고 신축한 것도 있었다.
[법전의 규정]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에는 원우의 관리에 관한 규정이 있다. 성저(城底)에 설치된 원은 한성부의 5부(部)가 관리하고 나머지의 원은 수령이 부근에 거주하는 백성을 원주(院主)로 삼아 보수하게 하였다. 원주의 관리는 각각 한성부와 각 도 관찰사가 담당하였다. 각 도로는 대·중·소로 구분하였는데, 원주는 도로의 등급에 맞게 차등하여 배정하였다. 대로의 경우 원주로 5호(戶)를 배정하였는데, 서울에서 포천에 이르는 길이 대로(大路)로 규정되었으며 양주목에 있는 녹양역(綠楊驛)이 그에 속해 있었으므로 도봉구에 있었던 누원은 원주로 5호가 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주로 차정된 호는 잡역(雜役)을 면제하도록 규정하였다.
[도봉구의 누원]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위치한 누원은 다락원이라고도 하였고, 옛 이름은 덕해원이다. 조선 초 명신 변계량(卞季良)[1369~1430]의 『춘정집 추보(春亭集追補)』에는 「양주 해촌 덕해원 조성 연화문(楊州海村德海院造成緣化文)」이 실려 있다. 『사가 시집 보유(四佳詩集補遺)』에는 역시 조선 전기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 「양주 덕해원(楊州德海院)」이 실려 있다. 또한 성종 대 좌의정을 지낸 신용개(申用漑)[1463~1519]의 문집 『이요정집(二樂亭集)』에는 「제 양주 덕해원 벽상(題楊州德海院壁上)」이 수록되어 있어 이 시기에 덕해원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조실록(宣祖實錄)』 권73, 선조 29년[1596] 3월 을해 기사에는 양주를 누원으로 옮겨서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자는 비변사의 건의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누원이 서울 인근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곳에 입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1728] 3월에는 누원에 군사를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 역시 누원의 입지가 서울 방어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정조실록(正祖實錄)』 권35 16년[1792] 9월과 이후의 일련의 기사에서는 광릉(光陵)을 참배하러 가는 정조가 누원을 경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교통로가 규모가 크고 중요한 곳이었음을 나타낸다. 『1872년 지방 지도』「양주 지도」에는 서울에서 이어지는 도로가 붉은색 선으로 그려져 있고, 해등촌면 표시와 함께 누원점을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