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20102 |
---|---|
한자 | 古代 三狸里 古墳群- 遺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씩실마을 뒷산 너머에 있는 안건마을의 북동쪽 구릉 자락에는 논공읍의 낙동강 일대 고분군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은 고분이 조성된 지역이었다.
[달성군의 고분군]
삼리1리 씩실마을 지역은 서쪽을 흐르는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서는 신라의 산성과 고분군이 확인되며, 강 건너 서쪽 지역에서는 대가야의 산성과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신라와 대가야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긴장관계가 유지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달성군 일대에서 최근까지 확인된 고분의 수가 34군(群)에 1450여기(餘基)정도이다.
[삼리리에 고분군이 확인되다]
1997년 대구대박물관의 현장조사를 통해 삼리리에서 100여기가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군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 넓은 평야와 강을 가진 구릉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농경과 그 필수 조건인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진 주변의 구릉지를 매장지로 선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리리고분은 대부분 봉분의 중앙이 도굴에 의해 파괴되어 석실 내부가 흉하게 드러나 있으며, 도굴은 조사시기 직전 까지도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고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분이 있었던 지역은 주민들의 생활공간이 아니었고, 몇 몇 토기 등이 육안으로 확인되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1990년대 와서 도굴이 많이 자행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달지, 남, 80세)
[삼리리고분의 구조]
1997년 조사에 의하면 중간 크기의 봉분은 직경 8m, 높이 1.5m 전후이고, 작은 무덤은 직경 4.5m, 높이 1m 전후로 거의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곽(石槨)이 드러난 곳을 측정한 결과 긴 쪽이 260cm, 짧은 쪽이 160cm 정도이며 거칠게 다듬은 산의 돌을 그대로 사용하여 벽석(壁石)을 쌓았고, 긴 쪽의 축은 산의 주능선의 역방향인 동서방향으로 조사되었다.
[추가로 밝혀진 고분들]
2012년 동국문화재연구원에서 씩실마을의 북동쪽 구릉의 남쪽능선 끝부분과 동쪽 능선 경사진 곳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곳은 당시 기존 국도를 확장하기 위해 산의 일부를 절개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도 삼국시대의 소형고분군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결과, 낮게 내려오는 구릉의 동쪽 경사진 쪽에는 주구(周溝)를 갖춘 횡구식 석실분 5기가 각자의 묘역을 갖춘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수혈식 석곽묘는 능선을 따라서 일렬로 배치되거나 단독으로 위치한 모습이다. 고분의 분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횡구식 석실분의 주구 범위로 볼때, 분구의 규모는 지름 10~12m 내외로 추정되며, 이 지역 고분군 내에 있어서는 중형분의 규모이다. 수혈식 석곽묘는 서로 인접한 모습으로 볼 때 하나의 분구(墳丘)를 공유하여 긴 타원형의 모습이거나 작은 타원형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횡구식 석실묘에 부속된 주구의 안에서는 일부 토기가 모두 부서진 상태로 발견되는데, 이들 유물은 제의(祭儀)유물로 판단된다.
특이하게 기존에 만들어진 고분을 재이용한 사례가 확인되었다. 4호 석곽묘는 원래 횡구식석실분의 석실을 재이용한 고분으로 조사결과 석실의 한쪽 벽면을 새로 쌓아서 횡구식석곽묘를 만들었다.
삼리리 고분군은 인접한 달성 성하리고분군과 비슷한 6세기 초 무렵에 조성된 소규모 고분군으로 확인되었으며, 낙동강 동안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다른 고분군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달성군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대구대학교 박물관, 1997)
『달성 삼리리·위천리 유적-대구 달성군 화원-옥포 국도5호선 내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동국문화재연구원, 2012)
정보제공자
이달지 (남, 80세,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