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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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運動- 富者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새마을운동으로 이룬 부자 마을
[마을 환경개선사업의 결실을 보다]
삼리1리 씩실마을에서의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새마을 운동에서 승호교 건설과 안길확장, 담장 개량 등의 환경개선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자 이영곤을 이어 새로운 지도자로 이숙현(李淑鉉)이 선출되었다. 당시 새마을지도자는 마을 집안어른들의 추천으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10여 년간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마을의 집안 어른들의 추천을 받아 지도자가 된 이숙현은 마을 주거환경 개선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승호교 가설에 적극 호응하였던 주민들이 마을 환경개선사업의 확대에는 반대를 심하게 하였다.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의 피해를 극복한 후 수박농사 등으로 이제 살만한데 갑자기 살던 집의 담장을 헐고 마을 안길을 넓히는데 반발하는 주민들로부터 이숙현은 멱살을 여러 번 잡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발에도 지도자 이숙현은 주민들을 설득하고 동참을 이끌어 내었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이어져]
지도자 이숙현의 주도하에 마을환경개선사업이 본격화되자 부녀회에서도 적극 협조하였다. 부녀회에서는 간이급수시설 설치를 위해 야간에 작업을 하는 주민들을 위해 5회에 걸쳐 야식을 제공하여 작업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씩실마을 출신 타향 인사들이 토지나 기부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대구 동산양말 사장 이우현은 진입로 포장사업을 위해 90만원을 기탁하기도 하였고 새마을 초대지도자였던 이영곤은 대지 50평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73년에는 하수도를 정비하고 초가 80여동을 기와로 완전 개량하였다. 지붕개량작업 중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살림도구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개량사업을 잘 마무리하였다. 1974년 4월에는 공동 우물 및 수동 펌프의 힘을 덜기 위해 80여호에 간이급수시설을 설치하여 위생적인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1975년에는 특별지원금 100만원으로 소하천을 정비하였고, 주민들이 자력으로 32평의 2층 새마을 회관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76년에는 마을의 공동창고를 건립하였으며 하수구 설치와 담장개량, 지붕도색사업을 전개하였다. 1977년에는 마을 안길포장과 국도변 가꾸기 사업을 정부 지원 하에 추진하였다.
[주민총회를 통해 마을 공동체의 기능을 발휘]
당시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주민총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1976년 5월 15일 개최된 주민총회에서는 소하천 정비사업의 정산결과를 보고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된 수입을 마을 구판장 사업에 사용하고, 구판장 사업에서 얻어진 수입을 농토조성과 국도변 가꾸기에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마침내 ‘부자마을’로 주목받아]
이숙현지도자는 마을환경개선사업과 함께 소득증대를 위해서 특수작물재배기술의 습득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기존 재배해 오던 수박과 더불어 새로이 토마토 재배를 정착시켜 새로운 소득작물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평가받아 1977년에는 경제동향보고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특별지원금 300만원을 받았다. 이러한 지원금에 주민들이 360만원을 부담하여 공동 트렉터를 구입하여 새마을운동의 우수마을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씩실마을은 달성군 새마을운동의 교육장이 되었다. 공무원들이 마을에 와서 새마을운동 관련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마을을 방문하여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견학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신문, 조선일보, 신아일보에서 마을을 방문하여 시설채소재배와 새마을운동의 현황을 취재해 가기도 하였다. 1975년에는 과테말라 육군 소장일행이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였다.[연도: 1977년, 경제동향보고 우수마을로 선정됨]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에는 각종 조직이 결성되어 활력소가 되었다. 새마을개발위원회는 마을주거환경개선사업과 주민총회를 주도하였고, 마을 금고를 육성하였다. 마을금고 육성과 관련해서 마을을 대표하여 이영수가 대통령표창(사진)을 받기도 하였다. 새마을 작목반은 고소득 작물에 대한 영농기술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새마을부녀회는 폐품수집과 쌀 절약운동, 그리고 구판장 운영을 통해 봉사하였다. 그리고 새마을 청소년회도 결성되어 청소년들의 정서생활과 영농기술 보급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마을의 생활환경을 한층 쾌적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단결하여 일의 성과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민총회를 통해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고, 특수작물 재배기술을 익혀 농가소득 증대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1974년 호당 소득이 85만원이었는데 1980년도에는 350만원이라는 급격한 소득증대도 이루면서 부자마을로서 알려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영광의 발자취-마을 단위 새마을운동 추진사』 제4집, (마을문고 본부, 1981)
정보제공자
이산출 (남,1942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전 새마을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