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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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陽村 李蘭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씩실마을을 만든 양촌 이난미
〔사촌 동호 이서의 권유로 낙동강을 건너〕
지금부터 400여년전 당시 성주군 고탄리에서 강을 건너와 승호(承湖) 위쪽에 집을 짓고 터를 잡은 이는 이서였다. 한강 정구의 제자였던 그는 스승의 죽음 이후 관직을 마다하고 승호 곁으로 이주해 와서 호를 동호(東湖)라 하고 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서는 낙동강과 승호, 그리고 비슬산 자락이 주는 경관을 사촌이었던 이난귀, 이난미 형제에게 권유하게 된다. 이러한 사촌형의 권유를 받고 강을 건너와 마을을 만든 이가 양촌 이난미였다.
〔성주의 광산이씨 삼처사 후손으로 태어나〕
성주의 대표적인 학자인 한강 정구는 지역에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존경하였던 인물들이 바로 광산이씨 삼처사였다. 이수의 아들 삼형제였던 이홍기, 이홍량, 이홍우가 바로 그들이다.
용재 이홍기(1531~1582)는 1568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힘써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육일헌 이홍량(1531~1592) 또한 1568년 증광시에 합격했고, 숨은 인재로 천거되어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모제 이홍우(1535~1594) 역시 무과에 합격하여 주위의 기대를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한강 정구는 서울에서 자신의 배필을 구하려 하자 ‘나는 부귀한 집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광산이씨 삼형제의 행실에 감동하여 그 집 문중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삼형제의 누이에게 장가들었다. 이러한 삼형제 가운데 육일헌 이홍량의 둘째로 태어난 것이 이난미였다.
〔양촌마을을 만든 이난미 〕
이난미(1592~1661)의 자는 유형(幼馨)이고, 호는 양촌(陽村)이다. 그가 태어난 해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첫돌이 되지도 않아서 부친 이홍량이 김면장군의 의병진에 가담했다가 거창의 아림 전항촌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김면 장군은 학문의 벗인 이홍량을 위해 의병들로 하여금 운구를 적극 도와주었다고 한다.
후일 너무 어려서 부친에게 효도치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니 향촌에서 ‘효자’라 칭찬하고, 모두 광산이씨의 가풍이라고 하였다. 유년 시절 족형 이난귀와 함께 당시 성천부사로 있던 고모부인 한강 정구를 찾아가 의지했다. 성천에 머무르면서 정구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힘썼다. 그의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삼처사(三處士)의 후손으로서 족형 이난귀와 함께 동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난미는 중년에 사촌 이서의 권유를 받고 성주 고탄을 떠나 승호 곁 양지바른 곳에 터를 닦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양촌옹(陽村翁)이라 하였다.
“당시는 승호(承湖) 주변이 모두 갈대밭이었다고 합니다. 이걸 양촌공이 이주해 와서 개간했다고 해요. 양촌공이 웃대 어른들 재산 좀 물려받은 것으로 이 삼리 일대의 산과 땅을 매입했다 하네요.”(이영수, 남 77세)
양촌 이난미 또한 윗대의 전통을 이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출중한 학문을 배경으로 70세가 다되어 우로(優老)의 법으로 통정대부 행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行 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난미를 일러 나이와 덕과 벼슬이 높았다 하여 삼달 (三達)이라 하였다. 그 해 7월 4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성주군 가리현 고탄리에 두었다.
참고문헌
李禹鉉 主幹 『光山李氏世稿 國譯全』 (西大邱印刷所, 1986)
낙강칠현시비보존회『洛江七賢誌』(大譜社, 2007)
정보제공자
이영수(남, 1939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광산이씨 중파 14대종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