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A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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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과 護國 報勳- 愛國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정의]
6·25전쟁과 호국ㆍ보훈의 애국심
[낙동강 방어선 구축과 다리목 마을]
낙동강 방어선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내기 위해 낙동강을 따라 설정한 방어선을 의미한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km, 남북 160km로 서북쪽으로는 경북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포항에 이른다. 한편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진주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를 거쳐 진해만에 이른다.
국군과 유엔 연합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의 북쪽을 맡았다.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았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 인민군은 돌파를 시도하고 국군과 연합군은 이를 사수하기 위한 필사의 전투를 벌였다. 그런 만큼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피아간에 엄청난 희생도 뒤따랐다. 대구 북방의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 인민군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 전투를 벌였다.
당시 다리목 마을은 다부동과 왜관, 고령 등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 서부전선의 한 축으로서 뚫리게 되면 대구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해 야간을 틈타 다리목 마을 일대로 넘어왔다. 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다리목 마을 인근 시저 마을(강림 2동)에 포병대를 주둔시켜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마을 사람들의 피난 생활]
다리목 마을은 대촌으로 은신이 용이하고 넓은 들판에서 수확한 양식도 풍부해서 북한 인민군으로서는 다리목 마을의 확보가 중요했다. 다리목 마을은 낙동강 유역에 입지해 있으므로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인근의 금계산 계곡이나 대구 등지로 피난 갔다. 청도 김씨들은 일가들이 사는 경북 청도까지 피난을 갔다. 금계산 계곡의 일부 피난민들은 양식을 조달하려 몰래 마을을 드나들었다. 어떤 이는 이 과정에서 변을 당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대구 대봉동 용두방천에서 바닥에 자리 갈고 그냥 잤지요. 돌멩이 위에 냄비 걸어놓고 밥 해먹고요. 조금 있으니 다른 데로 피난가라고 해서 이번에는 일가들이 사는 청도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집에 들어가서 살았지요.”(김안순)
8월 한 달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은 북쪽으로 퇴각했다.
[돌아온 자들의 마을 복구 활동]
전세가 바뀌어 북한 인민군이 물러가자 가을 무렵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서 되돌아왔다. 들판의 알곡은 익어 가는데 마을 가옥들은 단 4채만 남겨둔 채 온통 불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낙동강을 건너온 북한 인민군을 퇴치하기 위한 아군의 고육지책이었다. 어두운 야간에 낙동강을 건너 다리목 마을로 들어오다가 밤숲으로 뒤덮여 있던 마가들 선늪에 빠져 죽은 북한군의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마가들에서는 미군의 낙하산도 상당수 발견되었다.
“두세 채만 온전하고 마을 전체가 완전히 불탔어요. 마을에 양식도 많고 하니까 인민군 퇴치 목적에서 아마 아군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밤에 낙동강을 건너오다가 선늪에 빠져죽은 인민군 시체가 많았어요.”(김안순)
모든 가옥들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피난길에서 되돌아온 사람들은 당장 거처할 곳이 없었다. 흙으로 담을 치고 지붕만 얹은 이른바 ‘담집’을 지어 살았다. 일부는 미군의 포탄 껍질을 주어다가 임시 가옥의 기둥으로 활용했다. 나무가 귀한 시절이라 낙동강 주변의 버드나무도 베어다가 사용했다.
이후 차츰 안정이 되어가자 마을 사람들은 가옥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경제 사정이 나은 집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건축 자재를 구입해서 집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복구가 지연되어 20여 년이나 걸렸다.
[다리목 마을 사람들의 호국ㆍ보훈의 애국심]
국군이 수세에 몰린 이러한 상황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갔다. 호수가 많았던 다리목 마을에서도 기사생(1929년생)과 경호생(1930년생) 위주로 20여 명이나 되었다. 전쟁 발발 초기 전세가 급박한 상황에서 입대했던 참전자들의 희생이 더 컸다.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참전 1기생’으로 표현되는 기사생들은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화했다고 한다.
기사생들은 다리목 마을 사람들이 피난 가기 전 입대 영장을 받고 참전했다. 참전자들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어 후세대에 호국ㆍ보훈의 귀감이 되고 있다. 가옥의 대문에 부착된 ‘충절의 집’이라는 표식은 6.25 전쟁 때 조국을 지키다 전사한 이들을 지칭한다. 고 이만수(李萬壽) 선생의 고택을 비롯하여 다리목 마을 여러 집에는 이러한 표식들이 붙어 있다. 6.25 전쟁 중 그의 장남(이원희, 1929년생)은 경북대학교 재학 중 참전하여 영천 안강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참고 문헌]
인터넷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hyanggun/15913544)
[정보 제공자]
김선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김안순(남, 194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노인회장)
김숙이(여, 1948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부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