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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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炳圭 |
영어공식명칭 | Song Byeonggyu |
이칭/별칭 | 경칠(景七),만회(晩悔),문익공(文益公)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경칠(景七), 호는 만회(晩悔)이다.
[활동 사항]
송병규(宋炳圭)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우면서도 매사에 분명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송병규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베어 그 피를 수혈하여 다시 되살아나게 하였다. 그런데 삼 일이 지난 후 다시 모친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송병규는 재차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삼 년여를 더 살게 하였다. 송병규는 어머니를 여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던 중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나라를 잃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항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효성과 순절(殉節)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워 세상 사람들에게 사표(師表)로 삼게 하였다. 벼슬은 고종(高宗)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1914년 송병규의 효성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조 비각(碑閣) 효자 은진 송공비(孝子恩津宋公碑)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318번지에 있다. 효자 은진 송공비는 높이 103㎝, 폭 35㎝, 두께 17㎝에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의 양쪽 모서리를 잘라 낸 귀잡이 양식으로, 그 좌우에 보호대를 세우고 상부에 화강암으로 된 옥개석(屋蓋石)을 덮어 놓았다. 앞면에는 「효자 은진 송공비명(孝子恩津宋公碑銘)」과 갑인(甲寅)[1914] 4월의 건비(建碑) 명(銘)이 새겨져 있다. 시호는 문익공(文益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