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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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龍圭 |
영어공식명칭 | Park Yonggy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정원 |
[정의]
일제 강점기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한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달성군에서 태어난 박용규(朴龍圭)는 서울의 중앙 고등 보통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용규를 포함한 중앙 고등 보통 학교와 중동 학교 학생인 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은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 고등 보통 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동맹 휴학의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항일 학생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1926년 5월 29일 통동(通洞)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 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 민족 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 4000여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박용규를 비롯한 중앙 고등 보통 학교 학생 300여 명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박용규는 연희 전문 학교와 중앙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과 함께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제령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1927년 9월 6·10 만세 운동의 주역 이천호(李天鎬)·이선호(李先鎬)·박두종(朴斗鍾)·황정환·이동환·곽대형·김재문 등과 함께 만기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