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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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璨會 |
영어공식명칭 | Gu Chanhoe |
이칭/별칭 | 찬옥,소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찬옥(粲玉), 호는 소봉(小峰).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한 명인 구송은(具松隱)의 19세손이다. 조선조 임진왜란 때 창의 수훈한 첨정공 구회신(具懷愼)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구재서(具在書)이다.
[활동 사항]
구찬회(具璨會)[1890~1910]는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16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춘추(春秋)』 등을 독파하였다. 또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4월 집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갔다. 서울에 있는 배재 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융희 학교(隆熙學校)로 전학하였다. 1905년 융희 학교 재학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교우를 규합, 척왜 비사(斥倭祕社)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자, 서울에 유학 중이던 구찬회도 신민회에 최연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09년 중국에 망명 중인 김대락으로부터 “한민족은 단결하여 왜구를 몰아내자”는 내용의 포고문과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인쇄물이 국내에 전달되었다. 또한 김좌진(金佐鎭)·이경희(李慶熙)로부터 위임을 받아 전단 등을 자필로 써서 국내 각지에 반포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1909년 12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21살이던 1910년 5월 13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서울에 유학 중이던 학생 및 동지들이 구찬회의 유해를 고향으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구찬회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