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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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升鉉 |
영어공식명칭 | Park Seunghyeon |
이칭/별칭 | 유숙(猷叔),퇴초(退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유숙(猷叔), 호는 퇴초(退樵). 증조할아버지는 별검(別檢)을 지낸 박성준(朴聖俊), 할아버지는 증이조 참판(贈吏曹參判) 박광호(朴光昊)이다. 아버지는 박기성(朴基宬), 어머니는 진사(進士) 최광익(崔光翊)의 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부인은 윤양열(尹養烈)의 딸 숙인(淑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박승현(朴升鉉)[1778~1835]은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07년(순조 7) 토역정시(討逆庭試)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1807년 예조 좌랑(禮曹佐郞), 1808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811년(순조 11)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민심 수습 및 책임자 문책과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이에 상소를 올려 재해를 입은 각 도에 감진어사(監賑御史) 파견을 요청하였고, 1812년에는 방비를 소홀히 한 전·현직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탄핵하였다. 또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적들이 한양으로 쳐들어 올 것 같다며, 먼저 도성을 도망친 사족들을 처벌하자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1815년(순조 15) 홍문록(弘文錄)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박승현은 4점을 받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적들은 박승현이 생각이 깊지 않고 심질(心疾)이 있어 일전에 스스로 목을 찔렀다며, 박승현이 홍문록에 드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에 박승현을 옹호하는 관료들은 그의 문장력이 뛰어나 충분히 홍문록에 들 수 있었으나, 숙부 박기굉(朴基宏)이 먼저 홍문관에 들어가 있는 까닭에 뽑히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정적들의 공격을 당한 것은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많은 관료들을 탄핵하였기 때문이다.
1821년(순조 21) 은율 현감(恩栗縣監)에 부임하였다. 재임 시절에 인근 고을 모두가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박승현의 다스림으로 은율현만 평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렵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위치한 석포(石浦)에 복거(卜居)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조정에서 40여 차례 교지를 내렸으나, 관직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1834년 「순천 박씨 삼세정충기실비(順天朴氏三世旌忠記實碑)」를 썼다. 이 비석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의 순천 박씨 세거지의 삼충각(三忠閣) 안에 세워져 있다. 삼충각은 박승현의 방계 선조인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과 그의 둘째 아들 박순(朴珣), 그리고 박순의 유복자 박일산(朴一珊) 3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월함(月含)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