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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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扶植農園[達城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본인 가도민랑이 설립한 사회사업 단체.
[설립 목적]
조선부식농원(朝鮮扶植農園)은 농업을 통해 조선 농민의 자활과 독립을 꾀한다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10년 11월 오사카[大阪] 범애 부식회의 창설자인 가도민랑(加島敏郞)이 조선 총독부 및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후원을 얻어 당시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서 개원하였다. 조선부식농원은 1910년 11월 30일 인보부를 설립하였다. 1914년 6월 10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재단 법인 허가를 받았고, 1920년에는 조선인 청소년을 수용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재단 법인 조선부식농원은 이사 1명, 평의원 10명, 고문 2명 등을 두고, 구제, 농업, 인보, 자영, 식림 등의 5부를 통해 사업을 펼치고자 하였다. 사업비는 농장 수입과 일반 기부금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조선 총독부와 도 지방비 보조금을 등을 지원받아 운영되었다. 또 1923년 이래 매년 일본의 건국 기념일에 해당하는 기원절(紀元莭)에 일본 정부로부터 사회사업 장려 취지의 하사금을 받았다. 또 경복회로부터 1925년과 1926년에 각 1,000원의 조성금을 받았다. 그 뒤로도 일본 정부로부터 사회사업 공로자로 선정되어 하사금과 은배 등을 하사받았다. 1929년 8월 1일 재단 법인 경복회로부터 장려금 명목으로 종신 연금 300원을 지원받았다.
인보부의 구체적 사업은 조선부식농원 부근 주민의 생활 안정과 풍속 개선 등을 위해 매년 겨울철에 야학부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1923년에는 달성군 해안면 청년들을 대상으로 청년단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조선부식농원은 청년단에게 농원 토지 전 1반보(反步)[반보는 현재 땅의 면적을 나타내는 북한어로, 991.74㎡에 해당함], 연 1반보 규모를 무료로 빌려주되 공동 경작을 통해 생활 개선을 꾀할 계획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달성군 해안면에 설치된 조선부식농원은 사회사업을 표방하였으나 조선인에 대한 식민 지배 권력의 시혜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