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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446
한자 民俗學的 寶庫- 善德女王 崇慕祭
영어공식명칭 Sungmojae House of Queen Sunduk Folklorically Record
이칭/별칭 숭모재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10월연표보기 - 민속학적 보고인 선덕여왕 숭모재 제1회 선덕여왕 숭모재 시작
부인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지도보기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에서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을 기리기 위해 1986년부터 시작한 불교 행사.

[개설]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을 기리는 불교 행사인 ‘선덕여왕 숭모재’는 매년 음력 3월 보름에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위치한 부인사의 숭모전에서 열린다. 대한불교조계종 부인사가 주최하고, 28회째부터 선덕회가 주관하며, 동화사대구광역시 동구청, 국악방송 등이 후원하는 선덕여왕 숭모재는 2017년 현재 31회째를 맞고 있다.

[선덕여왕과 부인사]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서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화백회의에서 27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편에는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자가 왕이 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덕여왕은 재위 시절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정책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첨성대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를 세워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분황사, 영묘사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고, 호국의 의지를 담은 황룡사 9층 목탑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이다. 탑의 층수를 9층으로 한 것은 신라 인근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뜻에서 각 층마다 적국의 이름을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알 수 있는 행적 세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당나라 태종이 빨강색, 자주색, 하얀색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는데, 선덕여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씨앗을 심었더니 꽃에서 향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백제군이 여근곡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 것이다. 선덕여왕은 즉위 4년이던 635년에 영묘사를 세웠는데, 겨울에 영묘사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사나흘이나 울었다. 그러자 여왕은 군사를 보내어 서라벌 서쪽의 여근곡을 습격함으로써 백제군을 모두 물리치게 하였다. 후일 신하들이 이에 관해 묻자 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며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가리킨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이로 하여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지막으로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긴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자 낭산 남쪽에 있다고 가르쳐 준다. 여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유언대로 여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 후 679년 문무왕 때에 여왕의 무덤 아래쪽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따르면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여왕의 유언대로 실현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호국의 의지가 강하며, 예지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부인사 인근의 주민들이 오랫동안 여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인사에 전해지는 연기설화에 의하면, 숭모재가 열리는 부인사선덕여왕의 재위 중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선덕여왕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는 원당 사찰이라는 점도 주민들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부인사의 한자 이름은 부인산사(夫仁山寺), 부인사(夫人寺), 부인사(夫仁寺), 부인사(符仁寺)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958년에 세워진 ‘옥룡사 동진대사 보운비’에는 부인산사(夫仁山寺), 고려시대 『동국이상국집』과 「진각국사 비문」, 15세기 조선시대의 기록인 『고려사절요』, 『고려사』, 『삼봉집』 등에는 부인사(符仁寺)라고 쓰여 있다. 이와 달리 1530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920년대에 나온 『대구부읍지』에는 부인사(夫人寺)라고 나온다. 한편 1788년에 펴낸 『명부전 이건기』, 1911년 총독부 자료 『사찰령 동화사조』, 1999년에 간행된 『백불암선생(1705~1786) 언행록』에는 부인사(夫仁寺)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이름이 맞는 것인지 알기 어렵지만 현재 부인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에는 부인사(夫人寺)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선덕여왕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려는 측면이 강한 듯하다.

부인사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서 간행된 「초조대장경」[1011~1078년까지 각인]이 1132년(인종 10)에 흥왕사에서 부인사로 옮겨와 봉안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초조대장경」은 고종 19년(1232년) 몽골군의 2차 침략 때 불타서 없어지고, 현재는 일본 도쿄[東京]의 난젠지(南禪寺)에 인쇄본 1,715장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을 다름이다.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국왕 휘는 삼가 태자 공, 후, 백, 재추 그리고 문무백관과 더불어 향 피우고 머리 감아 재계하고 모든 허공계 시방의 한량없는 여러 불보살과 제석천을 우두머리로 하는 삼십삼천의 불법을 지키는 일체 영관에게 빌어 아뢰옵나이다. 심하도다. 달단의 침략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정이야 이미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어리석음과 아둔함 또한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가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이 있음을 짐작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범서(梵書)를 태워 없애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갈무리했던 대장경 판본도 남김없이 쓸어버렸으니, 아! 여러 해 쌓은 공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자비심을 베푸는 여러 부처님과 많은 천신에게도 차마 이러하거늘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저희들이 지혜가 어둡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방비하는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능히 부처님의 경전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큰 보배를 상실하는 재난에 이르렀으니 실로 저희들이 낯을 들 수 없을 따름입니다.”

[숭모재의 역사]

부인사 경내에는 선덕묘가 있는데, 이곳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주민들이 70년 넘게 선덕여왕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986년 부인사의 회주인 성타승려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후 부인사가 신라 왕실의 원찰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판단하여 이를 계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86년 10월 제1회 선덕여왕 숭모재가 개최되었다. 이후 1989년 숭모전[동국대학교 장충식 교수가 전각명을 작명함]을 건립하고 선덕묘를 이곳으로 옮기고 대구 대도극장 작화사가 그린 「선덕여왕 영정」을 경북대학교 교수 유황이 그린 영정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원찰에서 이루어지는 제례이므로 불교 예법에 따라 제사를 모셨다. 또한 1991년 3월 성타승려가 지역사회와 불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숭모재를 집전할 단체를 결성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숭모회가 만들어졌다. 2013년에는 재(齋)의식을 불교식으로 복원하고, 선양하기 위해 부인사 선덕회를 결성하고 선덕회를 주관단체로 지정하였다. 이후 2014년에 제28회 행사를 진행하면서 축제의 의미가 담긴 제(祭)를 써서 선덕여왕 숭모제라고 부르던 것을 불교적인 의식을 뜻하는 재(齋)를 사용하여 선덕여왕 숭모재로 이름을 바꾸었다.

[숭모재 행사 내용]

2017년에 거행된 선덕여왕 숭모재 및 국악한마당 프로그램을 참조하면 숭모재는 크게 2부로 나누어 진행된다.

[제1부]

우선 11시부터 시작되는 제1부는 숭모재 본행사에 해당한다. 현음각의 종을 33번 타종하는 명종을 시작으로 연화사 주지 동호 승려 등의 삼귀의가 이어진다. 부인사 선덕회 육법공양단의 육법공양이 이루어진다. 쌀, 향, 꽃, 과일, 차, 촛불 등 여섯 가지 물건을 공양함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향 공양은 희생을, 등 공양은 지혜를, 차 공양은 민족과 청량함을, 과일 공양은 깨달음을, 꽃 공양은 수행의 성취를, 쌀 공양은 보시 바라밀을 상징한다. 육법공양이 끝나면 발원문 봉독이 이어지고 나서 봉원사 현성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의 범패가 연희된다. 범패는 불가에서 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의식용 음악으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역대 조사승들의 말씀에 곡을 붙인 것으로 나뉘며, 어산 혹은 인도 소리라고도 불린다. 세속의 노래나 춤과 달리 외부와 복잡한 인연을 끊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어서 연행자와 관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도록 돕는 수행도이다. ‘진감국사대공탑비문’을 참조하면 범패는 신라 헌덕왕 대 진감국사[774~850]가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우고 돌아온 뒤 여러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범패가 끝나고 내빈 소개, 법어, 축사, 인사 등이 이어진 다음 미륵정근과 헌향이 이루어진다. 이어서 최신아 예술단과 가람예술단이 「선덕여왕찬」과 「숭모전 주련송」 등을 음성 공양한다. 숭모전 주련송은 경북대학교 문경현 교수가 지은 주련, 즉 “선덕용비귀시/ 구층보탑진구이/ 일통삼국정난후/ 도리천궁일월지(善德龍飛貴時 九層寶塔鎭九夷 一統三國定亂後 利天宮日月遲)”을 바탕으로 작곡가 채치성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선덕여왕찬」은 미당 서정주가 향가 형식에 가깝게 쓴 시에 역시 채치성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선덕여왕찬」은 다음과 같다.

“신라 산야 자욱한 꽃밭에 크낙한 꽃 한송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벌 나비 닿을 수 없는 곳 으젓한 꽃 한송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구원의 손 뻗치시고, 시량도 보내시고,/ 존엄의 팔찌도 벗으시고, 언제나 빙그레 웃으시고,/ 하직하실 날도, 묻히실 하늘도, 유리처럼 환하게 아시던 님/ 오, 천삼백년은 오히려 가까웁네/ 선덕여왕 같은 이가 이 나라에 살았음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오, 선덕여왕 같은 이가 이 나라에 살았음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음성 공양이 끝나면 참가자가 모두 함께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사홍서원을 함으로써 숭모재 행사를 마치게 된다. 사홍서원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을 가리킨다. 중생무변서원도는 중생의 수가 한없이 많지만 모두를 교화하여 생사해탈의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겠다는 맹세이고, 번뇌무진서원단은 끝없는 번뇌를 반드시 끊어서 생사를 벗어나겠다는 맹세이며, 법문무량서원학은 한량이 없는 법문을 남김없이 배워 마치겠다는 맹세이며, 불도무상서원성은 위없는 최상의 불도를 마침내 이루겠다는 맹세를 가리킨다.

[제2부]

오후 1시부터 진행된 2부 특별공연에서는 서도소리 전수 조교인 유지숙이 「반메기비나리」를 독창하고, 이어서 유지숙과 그의 제자들이 민요 「산염불」, 「자진염불」, 「개성난봉가」, 「양산도」, 「사설난봉가」 등을 불렀다. 또한 전명신이 찬불가 「연꽃 피어오르리」와 국악가요 「독도아리랑」, 「배띄워라」 등을 불렀다. 최신아 예술단은 「너영나영」, 「태평가」, 「청춘가」 등의 민요를 부르고, 쟁강춤, 사당춤, 장구 5인무 등의 무용도 함께 공연했다. 그리고 가람예술단의 연주곡 「신뱃놀이」, 「방황」 공연, 박춘맹의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 눈 뜨는 대목’ 공연이 이어졌다, 이 밖에도 부인사 삼광루에서는 선덕여왕의 인품을 나타내는 ‘관, 인, 명, 민(寬仁明敏)’을 주제로 작은 전시회가 열렸고, ‘부인사 선덕여왕 어진(御眞) 변천사’도 제공되었다. 여기에는 월북화가 정종여가 1939년에 그린 ‘선덕부인 존영 봉안식’ 속에 담긴 선덕여왕의 모습, 제작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구 대도극장 작화사가 그린 영정, 1989년 전 경북대학교 교수 유황이 그린 영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2018년에 대구광역시청의 지원 하에 만들어질 선덕여왕의 국가표준영정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손연칠이 그리기로 되어 있다.

[민속학적 의의]

대구광역시 부인사에서 매년 음력 3월 보름에 개최되는 선덕여왕 숭모재는 2017년 현재 31회를 맞이하였지만, 민간 주도로 선덕여왕을 기리던 것까지 포함하면 그 역사가 100여 년이나 된다. 특히 사찰에서 신라의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례는 전국에서 선덕여왕 숭모재가 유일하다. 이러한 점에서 선덕여왕 숭모재는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민속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일부 의식이 유교식으로 치러지던 관행을 바꾸어 28회 숭모재부터는 불교식 원형에 가깝게 진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불교의식을 복원하는 데 한 전범이 될 수도 있다. 팔관회나 연등회와 같은 고려시대의 불교적 의례는 어느 정도 복원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라시대의 불교의식을 복원하는 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선덕여왕 숭모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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