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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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居講語 |
영어공식명칭 | Speech and teaching collect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39년 - 「평거강어」최흥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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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12년 - 「평거강어」최흥벽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06년 - 「평거강어」편집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16년 - 「평거강어」간행 |
배경 지역 | 「평거강어」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전장류|언행록 |
작가 | 최흥벽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흥원이 평소에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서 문인과 제자들과 강설한 내용을 집안 족제인 최흥벽이 모아 편집한 글.
[개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최흥벽(崔興璧)[1739~1812]은 조선 후기 학자이다. 자는 사교(士敎), 호는 두와(蠹窩), 본관은 경주이다. 최흥벽은 최흥원(崔興遠)과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이광정(李光靖)과 정종로(鄭宗魯) 등과 교유하였다.
[구성]
「평거강어(平居講語)」는 최흥원과 문인·제자들이 평소에 주고받은 학문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 강설(講說)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평거강어」[평소 강의하신 말씀]의 일부 내용이다.
“경록(經祿)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한 재주를 배우고 한 글자를 가르쳐도 곧 배움과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그 스스로 내력이 있는 것이고,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대저 배움이란 대학(大學)과 소학(小學)의 배움이요, 가르침이란 이것이 성(性)·도(道)·교(敎)의 가르침이니, 배움은 소학과 대학에 근본한 뒤에라야 비로소 가르침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이렇게 배움과 가르침의 뜻을 알아야 비로소 그 본의를 잃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학자가 말하는 법은 마땅히 겸졸(謙拙)해야 하니, 무릇 옳다 그르다고 말함에는 반드시 ‘아마’라는 자와 ‘인 것 같다’라는 자를 붙이면 뜻이 매우 좋다. 요즈음 사람들은 입만 열면 곧 ‘의리(義理)’라는 두 자를 말하여 나타내니, 나도 처음에는 또한 이런 병통이 있었으나, 근래에 의리가 무궁한 줄을 깨달았으니, 어찌 감히 가벼이 ‘의리(義理)’라는 글자를 말할 수 있겠는가?”
[특징]
「평거강어」는 질문의 형식과 내용이 매우 자유롭고 다양한 방면으로 뻗쳐 있다. 특히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관련된 문답이 많이 보인다.
[의의와 평가]
「평거강어」는 족제[성과 본이 같은 한 집안에서 아우뻘이 되는 먼 친척]이자 문인인 최흥벽이 최흥원에게 직접 들은 얘기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최흥벽이 간행한 『백불암언행록(百弗菴言行錄)』의 기초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