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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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遠 墓碣銘 |
영어공식명칭 | An epitaph on the grave of Heumg-Won Cho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38년 - 「최흥원묘갈명」정종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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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16년 - 「최흥원묘갈명」정종로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35년 - 「최흥원묘갈명」간행 |
배경 지역 | 「최흥원묘갈명」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비지류|묘갈명 |
작가 | 정종로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정종로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백불암 최흥원을 위해 지은 묘갈명.
[개설]
정종로(鄭宗魯)[1738~1816]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이다. 대제학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정종로는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주리(主理), 심성론(心性論)에서는 주기(主氣)를 취하여 절충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夫仁洞規)」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구성]
「최흥원묘갈명」은 서문(序文)과 비명(碑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서두에 최흥원의 자호(字號)·세계(世系)를 소개하고, 제수(除授)받은 벼슬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평소 효성스런 언행·평생에 이룬 학문적 성취를 나열하며 백불암이라고 자호를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에 가계(家系)를 설명하고, 최흥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비명에서는 최흥원의 공(功)과 덕(德)을 4자(字) 48구(句)로 노래하였다.
[내용]
「최흥원묘갈명」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탁재선생(卓哉先生)[우뚝하도다 선생은]/천부공수(天賦孔粹)[타고난 자질이 매우 순해서]/흥부대문(興不待文)[일어나기를 글에만 기다리지 아니하고]/심군시사(心君是事)[마음으로써 이것을 일삼았도다]/
일용운위(日用云爲)[나날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동개합리(動皆合理)[움직이면 모두 이치에 맞도다]/하학상달(下學上達)[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다다름이]/작유여지(綽有餘地)[넉넉하게 여지가 있도다]
[특징]
「최흥원묘갈명」은 비명에 효로써 이름난 증자(曾子)·민자건(閔子騫)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했던 춘진(春津)의 고사를 활용하여 최흥원의 인물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위편삼절(韋編三絶)[공자가 『주역(周易)』을 즐겨 읽어 책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뜻.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함을 강조한 고사]이란 고사를 활용하여 만년에 『주역』을 탐독한 최흥원의 삶을 잘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최흥원묘갈명」은 한 편의 묘갈문과 묘갈명을 통해 최흥원이 일생동안 쌓아놓은 공력과 그 성취를 간결한 문장으로 잘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