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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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代祖妣淑夫人淳昌薛氏墓碣 |
영어공식명칭 | Yukdaejobi sookbuin sunchang sulssi myogal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05년 -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최흥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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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6년 -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최흥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16년 -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간행 |
배경 지역 |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비지류|묘갈문 |
작가 | 최흥원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흥원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입향조인 최동집의 어머니인 숙부인 순창설씨의 묘갈문.
[개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최흥원의 육대조모[최동집의 어머니] 숙부인 순창설씨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서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낸 최계(崔誡)에게 시집와서 해안(解顏)[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 일대]에 거주하며 3남 2녀를 낳았다. 1630년 12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구성]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숙부인 집안의 세계(世系)를, 두 번째 단락에서는 숙부인의 가계(家系)를 설명하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숙부인의 덕을 기리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 마지막 단락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선조께서 여러 아들을 위하여 집을 짓고 땅을 두어 정성을 쌓아 학업을 권하고 문학을 가르쳐서 성취시키니, 세 아들이 모두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여 행의(行義)와 문장으로 소문이 났으니, 부인의 협조와 인도하고 기른 덕이 당시에 드러나서 지금까지도 후손들의 칭송이 되고 있으나 세대가 점점 멀고 가승(家乘)이 전하지 못하여 아름다운 행실과 깨끗한 범절을 상고하여 알 수가 없어서, 삼가 그 보계(譜系)에 연월(年月)을 기록하여 위와 같이 비석에 새겨서 후손들에게 알리노라.”
[특징]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은 집안의 세계(世系)가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육대조비숙부인순창설씨묘갈」은 집안에 큰 공이 있는 최동집 어머니의 아름다운 덕을 밝히고, 이를 통해 후대를 권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