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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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士大夫 -[東區] |
영어공식명칭 | Private Home of the Nobleman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 있었던 사대부 살림집
[개설]
지리학적 또는 인류학적 지식을 통하여 세계의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은 제각기 고유한 모양과 기능, 의미를 갖는 집을 지어 왔다. 집을 짓는 방식이나 형태에 있어서 민족이나 사회집단마다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환경, 생활양식, 가치관, 사회제도나 규범, 생산 조건에 따라 차이가 발생했다. 역사 속에서 상류계층의 주거문화가 정치적 권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권위와 개인취향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두어 왔다.
[대구 동구의 대표적 사대부 살림집]
대구광역시 동구의 대표적인 사대부 살림집으로 경주최씨 종가댁이 있다. 경주최씨들은 동구 둔산동에 옻골마을이라 불리는 동성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동구의 대표적 사대부 살림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기본인 형태이다. 동구에는 사대부 살림집으로 경주최씨 종가집[동구 둔산동 386], 대구 둔산동 최병룡 주택[동구 둔산동 387], 대구 둔산동 최세돈 주택[동구 둔산동 384], 대구 둔산동 최병소 주택[동구 둔산동 379] 등 4채가 남아 있다. 이들 살림집은 여러 번의 개보수를 통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백불고택(百弗古宅)이라 불리는 경주최씨 종가댁인 대구 백불암고택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 살림집이다. 현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대구 백불암고택은 대구지방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양반가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波)의 시조인 최단(崔鄲)의 후손인 인조 때 학자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1586~1661]이 이곳에 정착하였고, 최동집의 손자 최경함(崔慶涵)이 건립한 주택이다. 대구 백불암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보본당(報本堂), 별묘(別廟), 가묘(家廟), 포사(包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옻골마을의 살림집은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방식으로서 먼저 취침공간을 살펴보면 안채 안방은 안어른이나 며느리가 사용하며 사랑채는 바깥어른이나 아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바깥 대문에서 안채로 이르기까지는 꼭 사랑채를 거쳐야 하며 외부인의 시선이 안채로 바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활이나 독서 사색을 하는 등 주로 개인적인 기거장소는 각자 취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단란의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모두가 안방에 모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의 또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집안에 안채에서 사용하는 내측과 사랑채에서 사용하는 외측이 각각 따로 가설되어 있는 점이다.
실례로 최도영 가옥의 경우 가족 수는 3명이고 주된 취침장소는 할머니와 손녀가 안방을 쓰고, 할아버지는 건넌방을 사용한다. 여름이면 사랑채의 사랑방을 사용한다. 개인적인 공간과 주 기거공간 역시 취침이 이루어지고 있는 각자의 방을 이용한다. 그리고 텔레비전 시청이라든지 낮잠을 잔다든지 가족 공동의 단란과 휴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겨울에는 안방이 되고 여름이면 마루나 마당에 놓인 평상이 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세수와 목욕을 하는 장소가 계절별로 달랐는데 여름에는 수돗가에서 겨울에는 부엌에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 부엌으로 쓰던 곳을 고쳐 욕실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배설행위는 옛날에는 낮밤의 장소와 남녀의 장소가 달랐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 낮에는 고방 옆에 있는 화장실 즉 내측에서 볼일을 보았고 밤에는 마루에 요강을 두고 사용하였다고 한다. 남성의 경우는 사랑채 왼편으로 위치한 화장실 즉 외측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새로 지은 욕실 내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