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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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忠植[東區] |
영어공식명칭 | Chae Chungsik |
이칭/별칭 | 석우(石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11월 5일 - 채충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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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채충식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위원회 임시집행부의장,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담당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5월 - 채충식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채충식 조선건국동맹 경북조직 결성 |
몰년 시기/일시 | 1980년 - 채충식 사망 |
출생지 | 채충식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묘소 | 채충식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성격 | 교육운동가|언론인|민족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의 교육운동가, 언론인, 민족운동가.
[가계]
채충식은 1892년 음력 11월 15일,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성원(蔡星源)과 어머니 서남주(徐南珠)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채충식은 1923년 왜관청년회가 여성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왜관여자야학의 의무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이면서, 조선일보 왜관지국장으로 언론활동을 펼쳤다. 1925년 경상북도 칠곡군 12개 단체로 구성된 칠곡기근구제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6년 왜관청년회 운영의 동창학원의 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인 1926년 순종 인산에 즈음하여 민족의식 보급을 위해 활동하는 가운데 6·10만세운동으로 인해 왜관경찰서에 구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1926년 칠곡, 선산, 성주 등 3개 군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삼군기우단의 결성을 이끌었다. 1927년 1월 농촌개발과 문맹퇴치를 내걸고 농민생활 향상을 위한 생산조합과 소비조합 조직 형태인 조선농인사의 이사가 되었다. 1927년 신간회 칠곡지회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이 된 뒤 동 지회 의장 겸 서무부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경북기자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1928년 1월 개최 예정 경북기자대회의 임시집행부 의장이 되었다. 경북기자대회를 통해 결성된 경북기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위원회 임시집행부의장,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담당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하고,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2월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중 이육사가 연루된 대구격문사건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구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1932년 5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또 경북지역 언론인들과 함께 보도협조망을 통해 언론운동을 벌였다. 1944년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 경북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의 확대집행위원, 민족혁명당 경북총지부 결성준비위원회의 총무부장을 역임하면서 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술 및 작품]
채충식이 후손에게 남긴 한글필사본인 『잡록(雜錄)』이 있다.
[묘소]
채충식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채충식의 유품이 2016년 7월부터 10월 3일까지 대구근대역사관에서 개최된 「지오 이경희와 대구의 독립운동」 특별전에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