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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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憲植 |
영어공식명칭 | Chae Heonsik |
이칭/별칭 | 후담(後潭),정여(定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5월 28일 - 채헌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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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33년 10월 23일 - 채헌식 사망 |
출생지 | 채헌식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거주|이주지 | 채헌식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묘소|단소 | 채헌식 묘소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도곡]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인천 |
[정의]
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출신으로 활동한 유학자.
[가계]
채헌식의 자는 정여(定汝), 호는 후담(後潭),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아버지는 채농(蔡瀧)이고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이다.
[활동 사항]
채헌식은 18세에 한양[서울특별시]에 올라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자신의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여겨,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와 파계사 등에서 공부하였다. 31세이던 1886년(고종 23)에 알성시(謁聖試)에 참가하여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으로 회시(會試)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후 세상이 혼란함에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1년(고종 28) 37세에 낙육재(樂育齋) 재생시(齋生試)에 합격하여 6년간 거재(居齋)를 하였다. 당시에 동학도가 일어남에 동민을 규합하여 이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향내 유림과 문우관(文友觀)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을 도모하였다. 또 대구[대구광역시]의 근대학교인 협성학교(協成學校)의 건립에 참여하였고,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학문과 저술]
채헌식이 남긴 「문우관 창건기(文友觀創建記)」와 『후담문집(後潭文集)』이 있다.
[묘소]
채헌식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옛 지명 도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채헌식을 추모하며 전의(全義) 이기로(李基魯)가 지은 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