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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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師哲[東區] |
영어공식명칭 | Jeong Sacheol |
이칭/별칭 | 계명(季明),임하(林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황동권 |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의 공산의진군 초대 의병장에 추대된 문인 학자.
[가계]
정사철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명(季明), 호는 임하(林下)이다. 고려 때 좌복야를 지낸 정목(鄭穆)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적개공신으로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진 정종(鄭種)이고, 할아버지는 정예운(鄭禮耘), 아버지는 정세검(鄭世儉), 어머니는 진산진씨(珍山陳氏)로, 진가모(陳嘉謨)의 딸이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호연(李浩然)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광천(鄭光天)이다.
[활동 사항]
정사철은 1530년 4월 24일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처음으로 『효경(孝經)』을 배웠고, 8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10세 때 『소학』을 배웠고, 15세 때 『소학』 내편을 직접 필사하였다. 17세 때 『서경(書經)』을 공부했으며, 23세 때 『주역(周易)』을 읽었다. 1570년(선조 3) 41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571년(선조 4) 가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하초당(林下草堂)을 방문했는데, 정사철은 정구가 13살 아래임에도 도의로 사귀었다. 정구와 교유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듣고 크게 깨달아 날마다 성리학 관련 서적을 섭렵하며 깊이 탐독하였다.
한편, 40대 후반에 연정(蓮亭) 서형(徐浻),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송재(松齋) 주신언(朱愼言), 아들 정광천과 함께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을 유람했는데, 파계사, 정각소암(靜覺小庵), 삼성암(三聖庵), 광석대소암(廣石臺小庵), 염불암(念佛庵), 동화사 등지를 돌아보았다. 이때 지은 시 1수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리극심산책단공(理屐尋山策短笻)[나막신 끌고 짧은 지팡이 짚고 산 오르니]/석문심처백운봉(石門深處白雲封)[바위문 깊은 곳을 흰 구름이 감싸고 있네]/
승고묘결군지부(升高妙訣君知否)[높은 산을 오르는 비결을 그대는 아는가]/거거수등최상봉(去去須登最上峯)[가고 또 가면 반드시 최정상에 오른다네]
1587년(선조 20)에 남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대구 마천산(馬川山)의 선사(仙査)에 서당을 지어 강학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6일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에서 지역의 인사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지역 전역에 의병을 모아 공산의진군을 결성하였다. 이때 정사철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질병으로 인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낙재 서사원이 대신하였다. 1593년(선조 26) 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거창면으로 피신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그해 3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학문과 저술]
정사철은 퇴계 이황을 사숙하여 퇴계학을 추구했으며 도산으로 가서 퇴계 선생에게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정사철은 유학의 경전 중에서 특히 『소학』과 『주역』을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인 『서경』, 『심경』, 『근사록』, 『주자서절요』등을 깊이 연구했으며,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정사철은 1578년(선조 11)에 「관혼도설(冠婚圖說)」을 지었고, 1579년(선조 12)에 속수(涑水)와 경산(瓊山)의 저술을 참고하여 「거가잡의(居家雜儀)」를 지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4권 1책의 『임하집(林下集)』이 있다.
[묘소]
정사철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연화리 연화산(烟花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