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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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守忠[東區] |
영어공식명칭 | Jeong Suchung |
이칭/별칭 | 경부(敬夫),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401년 8월 11일 - 정수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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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0년 - 정수충 식년 문과에 급제함 |
활동 시기/일시 | 1451년 1월 - 정수충 승문원 부교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2년 10월 - 정수충 창신 교위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3년 4월 - 정수충 현신 교위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4년 8월 - 정수충 성균관 사예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6년 5월 - 정수충 성균관 사성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7년 - 정수충 첨지중추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1월 - 정수충 자헌대부에 임명. 하원군에 봉해짐. 성균관 사성 겸임 |
몰년 시기/일시 | 1469년 9월 - 정수충 사망 |
출생지 | 정수충 출생지 - 황해도 개성시 |
거주|이주지 | 정수충 이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
수학지 | 정수충 수학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
외가|처가 | 정수충 처가 - 경상북도 성주군 |
부임|활동지 | 정수충 부임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정수충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
사당|배향지 | 정수충 배향지 - 대구광역시 |
성격 | 문무관인 |
성별 | 남성 |
본관 | 하동 |
대표 관직 | 승문원 부교리|창신 교위|현신 교위|성균관 사예|성균관 사성 |
[정의]
조선 전기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출신 문신.
[가계]
정수충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부(敬夫),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아버지는 정제(鄭提),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딸이다. 부인은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보흔(閔普忻)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수충은 1401년(태종 1) 8월 11일에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정제를 따라 대구 해안현(解顔縣)[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으로 옮겨와 자랐다. 1422년(세종 4)에 아버지 정제가 전염병에 걸리자 집에서 5.9㎞[15리] 정도 떨어진 들판에 모신 뒤에 밤낮으로 역귀에서 제사지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 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몹시 슬퍼하면서 상례와 장례 절차를 직접 행하였다. 1433년(세종 6) 3월에 사정 민보흔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1438년(세종 20)에 선영을 참배하기 위해 대구로 가다가 성주(星州)[지금 경상북도 성주군]에 들러 처숙부 민보열(閔普悅)을 찾아뵈었다. 민보열이 자신을 위로하자, 정수충은 시 한수를 지어 대답을 대신하였다.
연방강장고향귀(年方强壯故鄕歸)[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에 고향 돌아오니]/교교여전일포의(皎皎如前一布衣)[옛날처럼 아주 깨끗한 한 명의 포의로다]/
막아고송함만취(莫訝孤松含晩翠)[외론 소나무 늦도록 푸름을 놀라지 마오]/세한응유후조기(歲寒應有後凋期)[날씨 추워진 뒤에 응당 늦게 시들 것이네]
1445년(세종 27)에 4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환관을 가르치는 선생에 선발되었다가, 세종의 인정을 받아 영응대군의 사부[스승]가 되었다. 1450년(세종 32)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460년 1월 자헌대부로 승진하였을 뿐 아니라 성균관 사성을 겸임하였다. 1465년(세조 11)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되면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에 의정부 좌찬성 종1품에 올랐으나, 지병으로 1469년 9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한편, 정수충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고 부정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며 은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세력에 빌붙지 않았고 청탁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사적으로 밀담을 나누지 않았고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친족 중에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밥을 주고 옷을 주었는가 하면 가난하여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에게는 재화로 도와주었다. 항상 여러 아들에게 “인(仁)을 하려고 하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가 되려고 하면 불인(不仁)해진다. 부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것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경계하였다.
[학문과 저술]
1451년(문종 1)에 세조를 따라 집현전으로 가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묘소]
정수충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산 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수충은 대구광역시에 있는 청백서원(淸白書院)에 제향되었다. 또한 정수충의 진영(眞影) 2점이 전하는데, 한 점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있는 화담사(花潭祠)에 있고, 다른 한 점은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 위치한 문절영당(文節影堂)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