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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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廷芝[東區] |
영어공식명칭 | Bae Jeongji |
이칭/별칭 | 공윤(公允),서한(瑞漢),금헌(琴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용석 |
[정의]
고려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출신 무신.
[개설]
배정지는 재물과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고 하며, 집에는 열 냥도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가계]
배정지(裵廷芝)의 본관은 대구(大邱)[달성(達城)]이며, 초명은 공윤(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배정지의 아버지는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배영(裵瑩)이며, 어머니는 우계군부인(羽溪郡夫人)으로 내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이신송(李臣松)의 딸이다. 낭장(郎將) 정승백(鄭承伯)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배성경(裵成慶)은 공민왕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을 토벌하다가 순절하였고, 둘째 아들 배천경(裵天慶)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거쳐 동경윤(東京尹)을 역임했고, 고려 공민왕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배함경(裵咸慶)은 큰 형 배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랐다.
[활동 사항]
배정지는 『고려사』에 의하면 겨우 10세 나이에 금위(禁衛)[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군대]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다고 한다. 1270년(원종 11)에 대몽골 전쟁으로 천도(遷都)했던(1232년) 강화(江華)에서 옛 도읍지 개경(開京)으로 다시 옮겨올 때 배정지의 나이가 11세였는데, 말고삐를 거머쥐고 왕을 호종(扈從)하여 그 공로로 대정(隊正)에 임명되었다. 1291년(충렬왕 17)에는 별장(別將)으로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현(燕岐縣)에서 합단(哈丹)[원나라의 반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로로 벼슬이 뛰어올라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인후(印侯)가 배정지를 데리고 원나라에 갔을 때에는 원나라 황제가 배정지를 불러서 보고는 말하기를 “과연 용사(勇士)로다.” 하면서, 은 50냥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양부(兩府)에서 추천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두 도(道)의 찰방(察訪)이 되어 간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징치(懲治)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고아와 노인들을 보호했으므로 온 관내가 평안하게 되어 칭송이 자자했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또한 전농사(典農司)와 유비창(有備倉) 업무를 맡아 보았다. 1318년(충숙왕 5)에는 탐라(耽羅)[지금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배정지가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로 임명되어 김성 등을 토벌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다. 1321년(충숙왕 8) 당쟁(黨爭)에 연루되어 배정지는 곤장을 맞고 죽림(竹林)[지금 경상남도 통영시]의 방호(防護)로 유배(流配)되었다. 배정지의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아버지 대신 귀양을 가겠다고 요청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둘이 함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병을 핑계로 문을 닫아걸고 일체 사람들과의 만남을 사절하고 날마다 거문고와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듬해인 1322년에 죽으니, 향년 64세였다.
[묘소]
배정지의 묘지(墓誌)는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이제현(李齊賢)이 지었으며, 글씨는 박유(朴濡)가 썼다.
[상훈과 추모]
배정지는 전라남도 나주시 초동사(草洞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