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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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樂 |
영어공식명칭 | Kim Rak |
이칭/별칭 | 최천(最天),양화당(養花堂),충장(忠壯),당악(唐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손경희 |
[정의]
후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서 벌어진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고려개국공신.
[개설]
김락은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 왕건으로부터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 후 김락은 927년 원보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을 쳐서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을 부수고 돌아왔다. 김락은 927년 9월 태조가 견훤의 후백제 군사와 공산(公山)에서 싸울 때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가계]
김락의 자는 최천(最天), 호는 양화당(養花堂),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당악(唐岳)이다. 신라 문성왕의 5세손이고 사도(司徒)를 지낸 무력(武力)의 맏아들로 강원도 격천(隔川)[지금의 통천]에서 태어났으며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정일품을 추서받았다. 당악(唐岳)김씨(金氏)의 성을 태조로부터 하사받아 당악김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활동 사항]
김락이 927년 7월 원보 재충(在忠)과 함께 대량성(大良城)[현 경상남도 합천군]을 쳐서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을 부수고 돌아왔다. 927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이를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지금 경상북도 영천시]를 습격하고 서울[지금 경상북도 경주시] 교외에 가까이 이르니 신라 왕이 연식(連式)을 보내 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시중 공훤(公萱), 대상 손행(孫幸), 정조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와 좋게 지낸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급한 일을 당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하고, 공훤 등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그런데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신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안에 두고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능욕했으며, 그 부하를 놓아 빈첩(嬪妾)들을 난행하게 하였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친히 정예한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김락은 이 공산전투[일명 동수전투]에서 태조를 위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공산전투에서는 신숭겸과 김락의 참전 과정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해 볼 부분이 있다.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공산 동수 입구에 있는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증원군으로 당도한 신숭겸과 김락의 대군이 합세하여 접전하였다”거나, 고려군이 첫 접전에서 패한 뒤 “살내(箭灘)[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과 서변동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를 경계로 후백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증원군이 합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두 장수가 이끄는 고려군이 합세하였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왕건이 이끄는 군대가 공산전투에서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는 내용만이 확인될 뿐이다.
2. 고려 건국과 김락
태조 왕건은 “개국을 도와 기이한 계략을 운용하고 세상을 뒤덮는 높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모토(茅土)를 나누어주고 높은 관작으로 포상하는 것은 여러 대에 걸친 떳떳한 법이요. 영원토록 전해 오는 큰 규범이다. 짐은 미천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나, 진실로 뭇 사람의 신망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 포악한 임금을 폐하던 때에 나에게 충신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을 시행하여 훈공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라며 조서를 내렸다. 김락은 견권(堅權),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연주(連珠), 마난(麻煖) 등과 함께 제2등이 되었다. 김락은 상으로 금은그릇과 비단요이불과 능라 포백을 차등있게 받았다.
[묘소]
김락의 묘소(墓所)는 당악(唐岳) 강로동(康魯洞)[현 평안남도 중화군 서남리]에 있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배향되었다.
[상훈과 추모]
태조 왕건은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김락의 명복을 빌고, 아우 김철(金鐵)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1120년 예종은 김락과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