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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지 중종 사제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255
한자 楊稀枝 中宗 賜祭文
영어공식명칭 Yanghiji Jungjong Sajemu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488년 - 「양희지 중종 사제문」 저자 중종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507년연표보기 - 「양희지 중종 사제문」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544년 - 「양희지 중종 사제문」 저자 중종 사망
성격 사제문
작가 중종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출신 문신 양희지에게 중종이 1507년에 내린 제문.

[개설]

양희지(楊熙止)[1439~1504]는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인재이며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양희지가 60세 되던 1498년(연산군 4) 7월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많은 신진 관료들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양희지는 1500년(연산군 6) 62세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부득이 부임하였다. 1500년 5월에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우레가 진동하여 양희지는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양희지의 상소로 인하여 서북도(西北道)로 귀양을 간 관료들의 귀양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은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순천으로 가고, 박한주(朴漢柱)[1459~1504]는 벽동(碧潼)에서 낙안으로 갔다. 또 이수공(李守恭)[1464~1504]은 창성(昌城)에서 광양으로 가고, 조위(曺偉)[1454~1503]는 의주에서 순천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양희지는 상소를 올려 큰 위기에 처하였으나 죽임은 면하였다. 훗날 중종(中宗)[1488~1544]이 즉위한 후 양희지가 1500년에 올린 상소문을 보고 1507년에 「양희지 중종 사제문(楊稀枝 中宗 賜祭文)」을 내렸다. 사제문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어 주면서 쓴 제문을 말한다.

[내용]

「양희지 중종 사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덕(正德) 2년(1507) 정묘(丁卯), 11월 경자(庚子) 16일 을묘(乙卯)에 국왕은 예조정랑 신 이현보(李賢輔)를 보내어 세상을 뜬 대사헌 양희지의 영전에 고유하고 제사하노라. 옛적 성종 때에 뛰어난 신하들이 많았다. 그중에 경이 유독 우뚝하였으니, 무리에서 빼어나 필적할 이 드물었다. 성균관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의롭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관직에 나아오던 그 첫해에 세상에 없는 영광을 입었다. 몸소 시를 짓고 이름을 지어 내렸으며, 연꽃 촛불로 정원으로 보내었도다. 예문관(藝文館)에서 맑은 기상 머금었고, 장의사(藏義寺)에서 특별히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청운의 벼슬길을 당당히 걸어 중한 직책에 거듭 올랐다. 마음을 열고 임금을 도와 잘못을 바로잡고, 이단을 물리치고 간사한 이를 물리쳤다. 들어오면 고(告)하고 나가면 선정을 베풀어, 조정의 모범이요 외직의 본보기였다. 정사와 문학으로 임금의 좌우에서 올바르게 보필하였다. 황하와 태산의 기상을 품었고,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다. 성조(聖朝)에 지우(知遇)를 입은 신하로서 바르게 열어 나갔다. 무오년(戊午年)[1498년]과 경신년(庚申年)[1500년] 때에 그 수립한 것이 우뚝하였다. 재난으로 인하여 현인(賢人)을 구하니, 자신의 일신은 돌보지 않았다. 빛나고 빛나는 그 충정이며, 맵고 매운 그 말이었다. 잠시 쫓겨난들 어찌 상심하랴. 오히려 임금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내가 사초(史草)를 열람하다가 경이 남긴 글을 얻어 보았노라. 세 번 거듭하여 읽고는 길이 탄식하니, 그대는 이미 아득한 구원(九原)에 있도다. 내 사저(私邸)에 있을 때를 기억하노니, 눈으로 보았고 마음으로 흠모하였다. 상서로운 난새와 봉새 같았고, 아름다운 옥이나 정채로운 황금 같았다. 나아가고 물러남이 화평하고 너그러워, 바라보면 마치 큰 소나무 같았다. 이 어려운 자리에 내가 서게 되매, 같은 조정에서 일하지 못함이 한스럽다. 추억하면 오로지 가슴 아픈데, 멀리 제물을 보내어 제사하노라. 밝은 영령이 있다면, 내려와서 받으라.”

[특징]

「양희지 중종 사제문」은 중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507년에 내린 제문이며, 양희지의 행적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양희지는 무오사화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과 오해를 받게 되었다. 양희지가 올린 상소에 대한 것은 1524년(중종 19)에 이가신(李可臣)이 지은 행장(行狀)에 언급되어 있으나, 중종이 내린 사제문으로 인하여 양희지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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