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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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性浩 |
영어공식명칭 | Jo Seongho |
이칭/별칭 | 선양(善養),만포(晩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838년 3월 28일 - 조성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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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6년 6월 4일 - 조성호 사망 |
출생지 | 오산동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 |
거주|이주지 | 갈산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 |
학교|수학지 | 칠곡 - 경상북도 칠곡군 |
묘소 | 조성호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함안(咸安) |
[정의]
개항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조성호(趙性浩)[1838~1906]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선양(善養), 호는 만포(晩圃)이다. 아버지는 조일호(趙馹祜)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괴산군수 조형도(趙亨道)의 9대손이다.
[활동 사항]
조성호는 1838년(헌종 4) 3월 28일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성재(省齋) 정종엽(鄭宗燁)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72년(고종 9) 향시에 참상(參賞)으로 합격하여 『육주약선(陸奏約選)』을 상으로 받았다. 중년에 성서(城西) 와룡산 자락 갈산동(葛山洞)[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으로 이주하여 몸소 농사를 지으며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경전을 강론하며 교유하였다.
조성호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14편의 글을 지었는데, 그 조목은 치심(治心)[마음을 다스림], 수신(修身)[몸을 수양함],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를 삼감], 신묵(愼默)[말을 삼감], 개과(改過)[허물을 고침], 질욕(窒慾)[욕심을 막음], 진덕(進德)[덕을 닦음], 회량(恢量)[도의 큼을 헤아림)], 수업(修業)[공부를 함], 정의(正義)[의를 바르게 함], 변사특(辨邪慝)[사특함을 분변함], 처환란(處患亂)[환란에 대처함], 제가(齊家)[집안을 영위함], 접인(接人)[사람을 대함]이다. 조성호는 1906년(광무 10) 6월 4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성호의 저술로는 『만포문집(晩浦文集)』이 있다.
[묘소]
조성호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에 있다. 묘갈명은 우하구(禹夏九)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