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729 |
---|---|
한자 | 畵巖 |
영어공식명칭 | Hwa-ar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44년 - 「화암」 저자 구연간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 「화암」 저자 구연간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33년 - 『근와문집』에 「화암」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구연간 |
[정의]
개항기 학자인 구연간이 대구의 연경서원과 화암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
[개설]
「화암(畵巖)」의 저자 구연간(具然侃)[1844~1917]의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성강(聖剛)이며, 호는 근와이다. 아버지는 구택조(具宅祖)이고,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 홍익대(洪益大)의 딸이다. 친모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우형간(禹衡幹)의 딸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문인이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 송병순(宋秉珣)[1839~1912], 전우(田愚)[1841~1922] 등과 교유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고, 강회(講會)와 계(契)를 조직하여 지역사회의 문풍(文風) 진작에 힘썼다. 저서로 『근와문집(謹窩文集)』이 있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광역시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며, 이황(李滉)[1501~1570]·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세 사람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의 사이에 있다.
화암산(畵巖山)은 해발고도 110m의 산이며, 지도상에 정식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화암(畵巖)이라는 하식애(河蝕崖)가 있는 산이라 하여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구성]
「화암」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선생장구문하년(先生杖屨問何年)[선생의 자취 어느 해인가 물어보지만]
유유기암영세전(猶有奇巖永世傳)[오히려 기암 있어 영원토록 전하여지네]
전계조전현가운(前溪鳥囀絃歌韻)[앞 시내에서는 현가의 노래마냥 새들 지저귀고]
고묘화비조두연(古廟花飛俎豆筵)[옛 사당 제향하던 자리는 꽃잎만 휘날리네]
현인유적무비도(賢人遺跡無非道)[현인이 남기신 자취는 도 아님이 없으니]
오배금행시역연(吾輩今行是亦緣)[우리들의 오늘 이 행차 또한 까닭 있겠지]
지수인산래면면(智水仁山來面面)[요수의 지자와 요산의 인자가 와서 둘러앉아]
유기흡호십분원(幽期恰好十分圓)[은일을 기약하니 흡사 넉넉한 둥근 달과 같네]
[특징]
「화암」은 ‘선(先)’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여 지은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화암」은 대구(對句)와 상단·하단을 ‘과거-현재’로 구성하여 정서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화암」의 창작 시기를 특정할 수 없으나 시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연경서원이 훼철된 이후에 지어진 작품이라 추정된다. 화암에 올라 옛 흔적만 남은 연경서원을 바라보며 선현의 자취를 그려 보고 시선을 다시 화자가 있는 화암으로 이동하여 모임의 성대함을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