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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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通讀回文 |
영어공식명칭 | Tongdok Hoemoon |
이칭/별칭 | 「통강을 알리는 회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통독회문」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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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5년 - 「통독회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통독회문」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에 「통독회문」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통독회문」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
성격 | 잡저|회문 |
작가 | 손처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강학 활동과 의병 활동을 한 손처눌이 통강의 재개를 알리기 위하여 1615년에 지은 안내문.
[개설]
「통독회문(通讀回文)」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손처눌은 임진왜란 후 서사원과 함께 대구 문풍의 진흥을 위하여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있던 연경서원과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천동 금호강 일대에 있었던 선사재(仙査齋)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학문적 동지였던 서사원이 죽고 통강(通講) 활동이 멈추었는데, 손처눌이 통강 활동을 다시 재개하고자 장소를 황청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서숙으로 옮기고 강학의 재개를 알렸다.
『국역 모당선생문집(國譯 慕堂先生文集)』에 수록된 「통독회문」의 이칭은 「통강을 알리는 회문」이다.
[구성]
「통독회문」은 강학의 중요성과 통독(通讀)의 일정·계획을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통독회문」의 전문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늘에게 부여 받은 임무가 중대하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바탕이 아름답지 않으면 진실로 풍속의 가운데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서 구차하게 세월만 낭비하고 나이는 때와 함께 치달려 필경 시들어 떨어져 버리는 사람이 많다. 반드시 스승의 지도와 벗의 경계를 기다린 후에야 성취하는 것이 있으니, 함께 자리하고 공부하여 경전의 뜻을 배우고 밝힘이 또한 어찌 격려하여 점점 연마하는 하나의 단서가 아니겠는가? 이에 근년에 연경서원과 선사재의 규약을 계승하여 지금 통독의 모임을 회복하려 한다. 우리 여러 동지와 군자들은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등 책들 가운데 각각 읽을 것을 가지고 다가오는 보름 하루 전에 황청동 서숙에 모두 모여 다시 규약을 설정하고, 이어서 읽을 것을 강(講)하면 매우 다행이겠다[士生斯世 所畀者重且大矣. 苟非生質之美 固難自拔於流俗之中 因仍苟且 悠悠泛泛 年與時馳 畢竟枯落者多矣. 必待指引規戒 然後有所成就 則合席同堂 講明經義 亦豈非激勵漸磨之一端也耶. 玆踵頃年硏査之規 欲復今日通讀之會. 凡我同志諸君子 於小學四子等書中 各持所讀 今望前一日 畢會黃靑洞書塾 更設規約 仍講所讀幸甚].”
[특징]
「통독회문」은 통독의 모든 계획이 협의가 되고 마지막으로 통보한 안내문이다. 통독 재개의 이유를 밝히며 대구 지역 유생들의 학업을 적극적으로 권면하는 내용이다. 통독을 재개하는 저자의 결연한 의지가 작품의 분위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통독회문」은 대구 지역에서 행하여졌던 통강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손처눌과 서사원이 대구 지역 문풍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통독을 재개하면서 실천윤리서인 『소학』과 기본 경전인 사서를 독서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볼 때, 대구 지역 유생들의 학업 기반을 닦으려는 손처눌의 노력과 당시 대구 지역의 학문적 분위기를 가늠하여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