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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서당 중건기2」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706
한자 靑湖書堂 重建記二
영어공식명칭 Chung-Ho seodang's reconstruction recor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76년 - 유도승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청호서당 중건기2」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42년 - 유도승 사망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지도보기
성격 잡기류|기문
작가 유도승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청호서원 중건에 대한 유도승의 기문.

[개설]

「청호서당 중건기2(靑湖書堂 重建記二)」의 배경이 되는 청호서원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모당(募堂) 손처눌(孫處訥), 사월(沙月) 유시번(柳時藩),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제향하고 있다. 손처눌 생전에 청호서당에서 강학 활동을 펼쳤다. 1694년 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손처눌의 6대조인 손조서손처눌의 위패를 모셨다. 1755년 유시번을 추가 배향하고, 1764년 정호인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9년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1930년 중건을 완료하고 ‘청호서당’으로 편액하였다. 196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9년 상인사(尙仁祠)를 중건하였고, 1972년 청호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청호서당 중건기2」을 쓴 유도승(柳道升)[1876~1942]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순경(舜卿)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구성]

「청호서당 중건기2」손처눌 학맥의 근원과 교유 관계를 밝히고, 제향 인물을 소개하며 청호서당 중건의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였다.

[내용]

「청호서당 중건기2」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구의 청호(靑湖)는 모당 손처눌 선생이 은거하며 수양하던 곳이다. 격재 손조서의 가문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등과 교유하며 도의를 강마하였다. 나라가 위급할 때 세 번이나 의병을 일으켜 국가에 충정을 드러내었고 두 차례에 걸쳐 사특한 무리를 배척하여 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의리를 보였다. 황청리[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선영 아래에 영모당(永慕堂)을 지어 시묘하였고, 시묘를 마치고는 영모당 곁에 서당을 짓고 청호서당으로 편액하여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덕을 이루고 재능을 이룬 자로 사월 유시번과 양계 정호인이 그 가운데 걸출한 사람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선생의 위패를 받들어 제향하고 그 후에 가학(家學) 연원의 유래를 밝히기 위하여 6대조인 격재 손조서를 오른쪽에 모시고 사월과 양계를 추배(追配)하여 선생이 도를 전함이 있음을 밝혔다. 불행히 서당이 훼철되는 명부 가운데 들게 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하기가 60여 년이니 선비들의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선생의 후손 손상헌(孫相憲) 등이 곡식을 내어 이자를 불려 몇 해 동안 쌓아 비로소 중건을 하니 곧 1930년 경오년 봄에 일을 마쳤다. 서당은 모두 4칸인데 앞마루는 반무(半廡)에 통하게 하였다. 아! 오늘의 서당 중수(重修)는 군자의 도가 회복되는 운이니, 옛날의 서원 복원이 어찌 새롭게 될 날이 없겠는가? 제군들은 힘써서 우리 유림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징]

「청호서당 중건기2」는 청호서당의 중건에 대한 핵심 정보인 서당의 역사, 배향 인물, 서당의 연혁, 중건의 이유와 목적, 중건의 과정을 간략히 제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호서당 중건기2」는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60여 년 뒤 자손들의 힘으로 서당을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1930년 청호서당을 중건하고 지은 중건기는 총 두 편인데, 유도승의 「청호서당 중건기2」에는 중건의 규모와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현재의 청호서원과 비교할 수 있다. 짧게 제시되어 있는 「청호서당 중건기2」의 기록을 통하여 현재 청호서원이 과거의 청호서당을 잘 고증하여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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