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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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硏經書院 奉安 退溪 李先生文 |
영어공식명칭 | An article for keep memorial tablet of Lee Hwang at Yeon-gyeong seowon |
이칭/별칭 | 연경서원에 퇴계 이 선생을 봉안하는 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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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 저자 정구의 『한강집』 간행 |
배경 지역 |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동구 지묘동 |
성격 | 축문|봉안문 |
작가 | 정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문신 정구가 연경서원에 이황의 위판을 봉안하면서 쓴 글.
[개설]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硏經書院奉安退溪李先生文)」을 쓴 정구(鄭逑)[1543~1620]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강집』이 있다. 연경서원은 현재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 사이에 있다.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은 임진왜란 후 연경서원을 중건하면서 지은 글이다. ‘연경서원에 퇴계 이 선생을 봉안하는 글’이라는 의미이다.
[구성]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은 4언체로 5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은 연경서원을 중건하고 이황의 위판을 다시 봉안하면서 쓴 글이다. 서두에서는 유학의 도통을 상징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주희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이황의 학문과 덕을 칭송하며 연모의 정을 드러내었다. 결문에서는 연경서원의 규모와 봉안의 이유를 말하며 글을 마무리하였다.
[특징]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은 이황의 학문과 덕을 축약적으로 제시하며, 이황의 위판을 재차 봉안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연경서원봉안퇴계이선생문」은 4언으로 이루어진 고체시로, 공맹(孔孟)에서 정자(程子), 주자(朱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우리나라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으로 연결시키며 이황의 공적을 드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