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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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正斥邪通文 |
영어공식명칭 | Boojeongcuksa-Tongmoon |
이칭/별칭 | 「정도를 바로 세우고 사도를 배척하는 통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부정척사통문」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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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1년 4월 - 「부정척사통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부정척사통문」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 |
성격 | 잡저|통문 |
작가 | 손처눌 |
[정의]
1611년 4월에 대구에서 강학 활동에 힘쓴 학자 손처눌이 정인홍의 상소에 대항하여 유생들의 공의를 얻고자 지은 통문.
[개설]
「부정척사통문(扶正斥邪通文)」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정인홍(鄭仁弘)[1536~1623]의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다. 경상남도 합천(陜川) 출신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수제자이다.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문묘(文廟) 종사(從祀)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李滉)[1501~1570]의 문묘 종사를 저지하려 하다가 유생들의 탄핵을 받았다.
「부정척사통문」의 창작 시기는 작품의 소주(疏註)에서 1611년 4월이라고 밝히고 있다. 1611년 5월 안동에서 상소를 위한 회의를 열기 전에 작성된 것이다.
[구성]
「부정척사통문」은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정인홍의 상소에 대한 일을 말하고, 부당함을 격렬히 토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부정척사통문」은 당시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라는 어명에 강원감사(江原監司)가 상소하여 주현(州縣)의 향학(鄕學)에 배향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이를 따르기로 하였는데, 정인홍이 상소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였다. 정인홍의 상소 소식을 들은 손처눌은 정인홍의 만행에 분개하여 병중에서 「부정척사통문」을 초하여 향교에 보내 여러 읍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유생들에게 대궐로 나아가 부르짖어 변무(辨誣)할 거사를 하게 하고, 5월에 안동에서 상소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부정척사통문」은 정인홍의 악행을 드러내고, 이를 저지하여야 할 당위성과 정인홍에 대한 유생들의 분개를 선동하여 상소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특징]
「부정척사통문」에서 정인홍을 ‘사(邪)’로 두고, 송나라 때 신법(新法)을 주장하였던 왕안석(王安石)·여혜경(呂惠卿)과 왕으로 봉하여져 전횡을 일삼았던 한탁주(韓侂胄)에 비견하여 정인홍이 저지르는 악행의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 종사에서 배척하려는 정인홍의 상소는 당시 팔도 유생에게 탄핵을 받았던 중대한 사안이었다. 「부정척사통문」을 통하여 영남 지역 선비들의 분개와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