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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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輓章 |
영어공식명칭 | Funeral Ode For Teacher Han-Gang Written By Seo-Sung |
이칭/별칭 | 「한강 정구 선생의 죽을음 애도한 만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정의]
대구의 구암서원에 제향된 조선 후기 문신 서성이 정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만장(輓章)」을 쓴 서성(徐渻)[1558~1631]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아버지는 서해(徐嶰)이고,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이고(李股)의 딸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이(李珥)[1536~1584]의 문인이다. 암행어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황해감사, 함경감사, 평안감사, 경기감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 시절에는 11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방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임금을 호종하여 강화도 등지까지 다녔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구성]
「만장」은 오언고시(五言古詩) 32행의 시이다.
[내용]
「만장」은 슬픔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이다. 아래는 「만장」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유종성남복(儒宗盛南服)[유학의 종장 남쪽 지역에 성대하니]
한훤천기원(寒暄闡其源)[한훤당 선생이 근원을 밝혀서이네]
퇴계진우성(退溪振于成)[퇴계 선생이 떨쳐 일어나 집대성하여]
사도최위존(師道最爲尊)[스승의 도리 가장 존귀한 것 되었네]
선생조승회(先生早承誨)[한강 선생이 일찍이 가르침 받아서]
예역우소돈(禮易尤所敦)[예학과 역경 더욱 열심히 익히셨네]
전정무절충(專精務折衷)[오로지 정밀히 하여 예법 절충하고]
완상탐천근(玩象探天根)[효상 익히시어 사단(四端) 탐구하셨네]
함장이시출(含章以時出)[아름다운 자질 언제나 드러내시어]
옥패인란손(玉佩紉蘭蓀)[난초 향이 옥패 둘러 있듯 하였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학문에 있어서 지주산(砥柱山)과 대들보와 같았던 정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공덕을 칭송하였다.
[특징]
「만장」은 고체시(古體詩)의 형식이며, 운을 대체로 ‘원(元)’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다가 다른 운의 글자로 바꾸어 전운(轉韻)하였다.
[의의와 평가]
「만장」은 당대 정구의 학문적 위치와 업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서성은 대구 유학의 계보를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황→정구로 설정하고 대구 지역 유학(儒學) 진흥과 문풍(文風) 진작을 위하여 힘썼던 정구의 학문적 노력과 공을 칭송하며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만장(輓章) 또는 만사(輓詞)는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지어지는 문학 작품인데, 문학적 차원의 표현 양식과 더불어 해당 인사와의 교류 양상을 추측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문학적 표현 양식에 있어서 서성의 「만장」은 고시(古詩) 형식의 작품이며 산문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서성은 고시의 형식 안에서 산문적 요소를 살려 정구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고 죽음을 애도하였다. 서성은 중앙 관료로서 활약한 문신이지만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할 만큼 학문을 즐겼고, 삼남 지방의 암행어사와 경상도·강원도·함경도·평안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지역 인사와 교류하고 학문적 외연을 넓혔다. 정구와의 교류도 이때에 이르러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라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