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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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次臣字 |
영어공식명칭 | Chasinj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차신자」 저자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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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8년 - 「차신자」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차신자」 저자 서사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낙재선생문집』 간행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산격동 산79-1] |
배경 지역 | 서사원 본가터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한시|오언율시 |
작가 | 서사원 |
[정의]
1598년 대구 출신의 의병장이자 학자인 서사원이 억울하게 구금된 상황에서 지은 한시.
[개설]
「차신자(次臣字)」의 저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서사원은 1598년 10월에 명나라 장수가 내려올 때 역참에 나와 접대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다. 서사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안찰사가 사전에 통지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억울하게 구금된 상황에서 「차신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구성]
「차신자」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내용]
주욕광전고(主辱曠前古)[임금은 전례 없이 욕을 당하건만]
유존미사신(猶存未死臣)[아직도 죽지 않은 신하 살아 있다]
매사의안옥(每思宜犴獄)[매번 옥에 갇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니]
기감원풍신(其敢怨楓宸)[어찌 감히 임금을 원망하랴]
자송무타증(自訟無他證)[스스로 따져 봐도 다른 증거 없기에]
회심지육신(灰心只肉身)[마음은 재 되고 육신만 남았다네]
종래학력험(從來學力驗)[예부터 학문의 효험은]
도재포산신(都在飽酸辛)[모두 혹독한 시련에 있다네]
[특징]
「차신자」는 ‘진(眞)’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오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