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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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承體察使分付領兵南下, 有儒生受業者携酒出餞, 因贈近軆 |
영어공식명칭 | A poem written by Seo-sawon in 1597 |
이칭/별칭 | 체찰사의 분부를 받들어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였는데 수업하였던 유생이 술을 가져오고 전별금을 내놓기에 근체시를 지어 주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중구 남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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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7년 -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서사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 저자 서사원의 『낙재선생문집』 간행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산격동 산79-1] |
배경 지역 | 서사원본가터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서사원 |
[정의]
대구 지역에서 구국 활동을 하던 서사원이 1597년 체찰사의 명을 받고 남하하는 도중 유생을 만나 지어 준 한시.
[개설]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承體察使分付領兵南下, 有儒生受業者携酒出餞, 因贈近軆)」를 쓴 서사원(徐思遠)[1550~1615]은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 시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 곽재겸(郭再謙), 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 『낙재선생문집』이 있다.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는 1597년 서사원이 48세 때 지은 작품으로, 체찰사의 명을 받아 남하하던 도중 가르쳤던 유생이 술과 전별금을 내놓기에 답례로 지어 준 한시이다. ‘체찰사의 분부를 받들어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였는데 수업하였던 유생이 술을 가져오고 전별금을 내놓기에 근체시를 지어 주다’라는 의미이다.
[구성]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는 칠언율시이다.
[내용]
이묘휴준위원정(二妙携樽慰遠征)[두 젊은이가 동이 술로 원정길 위로하니]
차시나부대군영(此時那復對羣英)[이제 언제 다시 여러 인재를 볼까나]
삼년미유명금화(三年未有鳴琴化)[삼년 토록 명금(鳴琴)의 교화 못 이루고]
일별도문장일행(一別徒聞杖釰行)[한 번 이별한 뒤 칼 짚고 갔단 말만 듣는다]
소우무망수구학(素友毋忘修舊學)[벗들이여, 옛 학문 닦기를 잊지 말게나]
장군당면사변성(將軍當勉死邊城)[장군은 의당 죽음으로 변방 성을 지키리니]
세한충신오감장(歲寒忠信吾堪仗)[세한(歲寒)의 충신(忠信)을 내가 의지하리니]
막작리정아녀정(莫作離亭兒女情)[이별에 아녀자와 같은 마음 갖지 말게나]
[특징]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는 경(庚)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승체찰사분부령병남하, 유유생수업자휴주출전, 인증근체」는 전쟁의 궁박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반가움과 고마움을 은은하게 드러내며, 학자이지만 장부로 처한 서사원의 기개가 돋보이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