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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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廟大樑通文 |
영어공식명칭 | Seongmyodaeryangtongmoon |
이칭/별칭 | 「공자 사당의 대들보에 대한 통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성묘대량통문」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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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05년 - 「성묘대량통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성묘대량통문」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성묘대량통문」 저자 손처눌의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대구향교대성전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성격 | 잡저|통문 |
작가 | 손처눌 |
[정의]
1605년 대구 출신 학자 손처눌이 공자 사당을 훼손한 아전의 처벌을 촉구하기 위하여 지은 통문.
[개설]
「성묘대량통문(聖廟大樑通文)」을 쓴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성묘(聖廟)는 문묘(文廟)이며, 공자를 모신 사당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대구향교(大邱鄕校) 대성전(大成殿)을 말한다.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에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599년에 관찰사 한준겸(韓浚謙)과 부사 김구정(金九鼎)이 사림과 협력하여 달성공원에 이전하여 재건하였다. 1605년에 관찰사 류영순(柳永詢)이 뱀과 전갈 등 불상지물(不祥之物)이 출현한다고 하여 옛터인 교동으로 다시 옮겼다. 지금 대구향교의 자리는 1932년에 옮긴 것이다.
「성묘대량통문」은 고을 사람이 향교의 대성전 대들보를 사사로운 용도로 쓰고자 하여 찍은 흔적을 보고, 그 죄를 성토할 목적으로 작성한 통문이다. 손처눌의 「연보(年譜)」에 1605년 8월에 사우들과 함께 달성에 모여 향교 옮기는 일을 의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0월에 향교 성조소(成造所)에 들어가 대성전 대들보 나무를 살펴보았다는 기사에 「성묘대량통문」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성묘대량통문」은 1605년 8월과 9월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
「성묘대량통문」은 공자 사당을 훼손시킨 죄의 무거움을 밝히며 처벌의 당위성을 드러내고, 대구 선비들의 성토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성묘대량통문」은 성인을 업신여기는 악함의 두 가지 사례를 들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의 악함은 성인과 한 세대를 살면서 지위가 같다고 하여 업신여기는 것이고, 두 번째 악함은 성인과의 세대가 매우 멀면서 개인의 사사로움에 빠져 망령되이 성인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첫 번째 악함은 공자를 죽이려 하였던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퇴(桓魋)를 말한 것이고, 두 번째 악함은 공자 사당을 훼손시킨 고을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죽어 마땅한 환퇴의 죄악을 드러내고, 공자의 사당을 훼손한 고을 사람의 죄악 역시 반드시 성토하여야 함을 밝혔다. 또한 인동(仁同)[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서 몇몇 유자(儒者)들이 무지로 인하여 성인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오해를 산 일에 대하여서도 선비들의 강력한 성토가 있었는데, 그보다 더한 지금의 사정에 대구의 선비들이 죄를 묻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성토하였다.
[특징]
「성묘대량통문」은 문답의 형식과 의론 형식을 적절히 배치하여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적합한 예시를 제시하여 유림의 성토를 촉구하였다.
[의의와 평가]
손처눌은 유림의 성토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두 가지 전제를 설정하여 사안의 엄정함을 드러내고, 사안에 대한 성토의 당위성을 자연스레 이끌어 내었다. 「성묘대량통문」은 논리 구조가 매우 치밀한 작품이며, 손처눌의 문장론과 문리(文理)의 정연함이 돋보이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