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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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亂後重刱硏經書院 次樂兄韻 |
영어공식명칭 |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Yeongyeongseowon Was Rebuilt And Reply To The Poem Of Nakjae |
이칭/별칭 | 「임진왜란 이후에 연경서원을 재건하고 서낙재의 시에 차운하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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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02년 -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산80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손처눌 |
[정의]
1602년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손처눌이 임진왜란 후 대구의 연경서원을 중건하고 서사원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한시.
[개설]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亂後重刱硏經書院次樂兄韻)」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서사원(徐思遠)[1550~1615],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 곽재겸, 손처눌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은 연경서원을 중건한 1602년에 지어진 시이다.
[구성]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계람이천괘소범(戒纜伊川掛小帆)[이천에서 조심히 닻줄 올려 작은 배로 출발하여]
선등여화구유암(先登如畫舊遊巖)[그림 같은 곳 먼저 올라보니 예전 놀던 바위구나]
중개기지지기지(重開基址知其止)[옛 터 다시 여니 예전에 머물던 곳인지 알겠고]
경벽문정희재삼(更闢門庭喜載芟)[문과 뜰 다시 열려 풀 베는 것마저 즐겁구나]
포경취도개행원(抱經就道皆行願)[경서 품고 도에 나아가니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고]
입실승당독출범(入室升堂獨出凡)[방에 들어가 당에도 오르니 범류에서 특출나구나]
지한로부혼차취(只恨老夫昏且醉)[노부는 혼미하고 취한 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이니]
환주종일무공함(還珠終日撫空函)[종일토록 빈 상자만 어루만지며 진주는 돌려주네]
[특징]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은 ‘함(咸)’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난후중창연경서원 차낙형운」은 손처눌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1602년에 중창(重創)하고 서사원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서사원의 학덕을 올리며 손처눌 자신은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수련(首聯)에서는 이천에서 연경서원으로 배를 타고 와서 화암(畵巖)에 오르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함련(頷聯)에서는 중창한 연경서원의 모습에 흐뭇한 감정을 노래하였다. 경련(頸聯)에서는 서사원의 학문적 수준과 실천을 칭송하고, 미련(尾聯)에서는 이황이 연경서원을 노래한 시의 결구와 매독환주(買櫝還珠) 고사를 활용하여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