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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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敬次退溪先生畫巖韻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The Hwa-arm Poem Written By Teacher Lee-hw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중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경차퇴계선생화암운」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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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1년 - 「경차퇴계선생화암운」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경차퇴계선생화암운」 서사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경차퇴계선생화암운」 저자 서사원의 『낙재선생문집』 간행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배경 지역 | 서사원 본가 터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한시|칠언절구 |
작가 | 서사원 |
[정의]
대구 지역의 연경서원을 노래한 이황의 한시에 1591년 대구 출신 의병장이며 학자인 서사원이 차운하여 지은 한시.
[개설]
「경차퇴계선생화암운(敬次退溪先生畫巖韻)」의 배경 지역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 지역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다. 이황(李滉)[1501~1570]·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3인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의 사이에 있다.
이황은 연경서원 건립 공사가 완공되어 가던 1565년(명종 19) 봄에 ‘서원십영(書院十詠)’ 시를 지었는데, 그중 한 수가 연경서원을 노래한 「화암서원(畫巖書院)」이다. ‘화암서원’은 연경서원의 별칭이다.
「경차퇴계선생화암운」을 지은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에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구성]
「경차퇴계선생화암운」은 칠언절구이다.
[내용]
도덕오동집대성(道德吾東集大成)[우리나라에 도덕을 집대성하여]
수지공력재궁경(須知功力在窮經)[경전 연구에 공력이 있음을 알았다]
은근제발류시의(慇懃題跋留詩意)[은근히 제발에 시의 뜻 남기시니]
취몽혼혼당유성(醉夢昏昏儻有醒)[가물가물 취하여 꿈꾸다 갑자기 깨어난다]
[특징]
「경차퇴계선생화암운」은 이황의 「화암서원」에 사용된 청(青)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여 지은 칠언절구이다.
[의의와 평가]
「경차퇴계선생화암운」은 임진왜란 직전에 지어진 작품으로, 평소 흠모하던 이황에 대한 존경과 학문에 대한 마음가짐을 드러낸 한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