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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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掛津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석배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 「서괘진」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Ⅱ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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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서괘진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9동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두사충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9동의 옛 이름인 서괘진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서괘진(西掛津)」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9동의 옛 이름인 ‘서괘진(西掛津)’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서괘진」은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명9동의 옛 이름 ‘서괘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괘진(掛津)’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대명동을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두사충(杜師忠)과 관련이 있다. 두사충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과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원병으로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귀화한 명나라 장군이다. 두사충은 이 지역이 강처럼 생겼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괘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東掛津)의 분기점은 지금의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顯忠路)를 기점으로 서편이 서괘진, 동편이 동괘진에 해당한다. 서괘진은 옛날 ‘안지랑골’ 또는 ‘안지랑’으로 불리는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이 견훤(甄萱)[867~936]에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안심하고 숨어 지내다가 돌아간 골짜기라 하여 고려 때부터 안지랑골로 불렸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서괘진」은 지명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