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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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府 敎坊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조선시대 대구부에 소속된 교방.
[개설]
대구부 교방(大邱府敎坊)은 조선시대 대구부에 소속된 기녀들에게 음악과 무용을 익혀 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기녀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전통 예술이 전승되고 꽃을 피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58년(세조 4) 종래의 전악서(典樂署)를 장악원(掌樂院)으로 개편하고 좌방(左坊)은 아악(雅樂), 우방(右坊)은 속악(俗樂)을 맡도록 하였다. 1900년(광무 4) 궁내부(宮內部)에 교방사(校坊司)를 두고 종래 우방에서 맡던 속악을 담당하게 하였다가 1905년(광무 9)에 폐지하였다. 조선시대에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되어 궁중의 장악원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대구, 경주, 진주, 김해, 창원 등에 설치된 교방이 유명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교방에서 노래, 춤, 악기를 익힌 기생들은 관변 행사는 물론이고, 일부는 시정의 유흥 공간에도 참여하였다. 대구부교방은 아문(衙門) 남쪽에 있었다. 1899년 편찬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 의하면 대구부 교방은 1895년에 혁파(革罷)되었다.
[구성]
1871년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를 비롯하여 여타 읍지에 대구부 교방에 소속된 기녀는 31명으로 되어 있으며,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1834~1906]이 지은 『자인총쇄록(滋仁叢鎻錄)』의 1888년 8월 2일 자에는 17명으로 되어 있다.
[현황]
대구부 교방은 1895년에 혁파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