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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제사여공 동맹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072
한자 大邱 製絲女功 同盟罷業
이칭/별칭 대구제사공장 여직공 동맹파업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노동쟁의

[정의]

1924년 대구 지역 조선제사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하여 일으킨 노동쟁의.

[역사적 배경]

1921년 대구 지역 공장 수는 100여 개, 노동자 수는 3,000여 명이었고, 1926년 공장 수는 200여 개, 노동자 수는 5,000여 명이었다. 주로 연초업, 제망업, 제사업 등 경공업 중심 공장이 주를 이루었다. 1920년대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제사(製絲) 공장이 바로 조선생사였다. 조선생사(朝鮮生絲)는 1919년 5월 30일 대구부 동운정 165에 자본금 1만 원 이상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주로 생란의 매매, 생사 제조 판매, 잠종의 제조 판매 등을 위주로 하는 회사였다. 조선의 제사업은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불안감이 많은 산업 분야였다. 1920년 제국잠사업자대회에서 제사 실 가격 조절을 위하여 1920년 11월 말부터 1921년 1월까지 3개월 간 일본 내 공장 휴업을 협의하자, 대구에서 규모가 큰 카타쿠라제사[片倉製絲]가 여직공 약 2,000명을 집단 해고한 일이 생길 정도였다. 이처럼 대구 지역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였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보호 하에 있던 일본인 공장주가 요구하는,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노동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도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조건을 개선할 정치적, 법률적, 제도적 권리를 강구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런 상황에서는 대구 지역 공장 노동자의 파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조선제사공장(朝鮮製絲工場) 여직공 450명은 1924년 4월 20일 4일 동안 조선제사공장 일본인 사장에게 하루 13시간 근무, 불결한 기숙사 환경, 저질의 음식 제공 등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였다.

당시 여직공의 나이는 13세에서 18세로, 하루 13시간 근무는 가혹한 노동 환경이었다. 여직공들이 노동조건 개선 중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것도 노동 시간 축소였다. 그러나 조선제사공장 사장의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자 여직공 70여 명이 동맹파업을 하고 대구정거장[대구역]에서 시위를 하였다. 대구역은 대구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자, 각종 문살이 모여드는 집산지였다. 따라서 여직공들은 대구역에서 조선제사공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선전하고 동조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밤이 될 때까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여직공들은 결국 조선제사공장으로 복귀하였다. 결국 대우 개선, 식사 개선,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한 파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조선제사공장 여직공 파업의 주원인이었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하여 조선제사공장 지배인[神山, 훗날 조선제사공장 전무]은 “일본에서도 공장법이 있지만, 열세 시간의 노동은 제사공장에 한하여 묵허를 받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노동 시간 축소를 거부하였다.

[결과]

조선제사공장 여직공 동맹파업은 여직공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면서 하루 만에 끝났다. 1920년대 초·중반 대구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운동 단체는 대구노동공제회였다. 대구노동공제회와 같은 노동단체는 조선제사공장 여성 노동자의 파업에 도움이 되거나 노동조건이 개선되도록 돕는 활동을 벌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제사공장 여직공 동맹파업은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조선제사공장 여직공 동맹파업은 대구 지역에서 미성년 여자 직공들이 자신들의 노동시간, 노동조건 등을 개선하고자 일으킨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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