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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전습소 기업공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976
한자 實業傳習所 機業工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1가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노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대구산업전습소 설립
성격 직업훈련소
설립자 통감부

[정의]

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제직 실습 중심의 제조 공장.

[개설]

일제는 대구·경북 지역 직물업을 독점·수탁하기 위하여 1906년에 대구산업전습소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전습 시설을 갖추고 족답기를 처음 도입하면서 경북 섬유공업 기술훈련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실습생으로 국비 훈련을 받았던 15명이 훗날 대구의 근대적 직물공업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설립 목적]

일제는 대구·경북 지역 직물업을 독점·수탁하기 위하여 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한 이후 1919년까지 2단계의 잠업 증산 계획을 세웠다. 제1단계는 1906년부터 1912년까지이며, 염직 기술을 보급·확대하기 위한 기술훈련기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제2단계는 1913년부터 1919년까지이며, 지역별 특산 직물에 대한 제직 기술의 개량과 품질개선이라는 명목하에 식민지 상인자본을 수탈한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변천]

1909년에 명주 제직법 훈련 목적으로 상주기업전습소가 설치되었으며, 1910년에는 마 제직법 훈련을 목적으로 안동기업전습소가 설치되어 남녀 15명이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1910년에 대구부에는 사설 염직소가 개설되었다. 1911년에는 대구부 외의 18개 군에 기업전습소가 개설되었으며, 1912년 말까지 경북 도내 기업전습소를 수료한 훈련생이 182명이나 배출되어 대구 염직물 생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적 상업자본의 하청 생산 체제로 조직 기반을 정비·강화하려는 목적으로 1913년에 직물 생산을 조직화하고자 안동군에 안동포조합을, 1914년에는 상주군에 기업조합을 설립하였다.

1914년에 지방분산 훈련 제도를 대구 집중 훈련 제도로 전환하여 고급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2년제 대구기업소 훈련 과정을 설치하였다. 특히 제사, 정련, 염색, 기계제사의 집중 실습, 기업자(機業者)의 원료 구입, 제품 판매 알선, 취업 지도 장려 등을 할 수 있는 자영 기반 확립을 위한 인력 양성이 목적이었다.

대구기업소의 졸업생은 1916년부터 1919년까지 34명[1916년 3월 제1회 졸업 14명, 1918년 3월 제2회 졸업 10명, 1919년 3월 제3회 졸업 10명]을 배출하였다. 대구기업소 훈련생들이 족답기의 새로운 제직법을 전파하고 족답기를 대여함으로써 중소 제직물 공장의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기술자의 대구 지역 집중 배출과 수입 제사를 통하여 직물업이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 반면 지방 기업조합의 기능이 약해져 마와 견직물의 지방생산 기반은 점차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는 대구·경북 지역의 직물업을 독점하고, 하청 생산 체제로 조직 기반을 구축하려고 실습생을 양성하였지만 잠업 정책에 따라 1911년부터 좌조(座繰) 또는 족답식 제사 방식이 보급되었다. 1918년에 일본 제사 자본인 산십제사(山十製絲)[야마주제사], 1919년 편창제사(片倉製絲)[가타쿠라제사]와 조선제사가 대구로 자사의 기계 시설을 이전함으로써 기계 제사 방식이 도입되면서, 섬유공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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