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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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敏英 |
영어공식명칭 | Jung Min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10월 2일 - 정민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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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정민영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3일 - 정민영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4일 - 정민영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21일 - 정민영 고등법원형사부에서 상고 기각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9월 10일 - 정민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정민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대신동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거주|이주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중앙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민영(鄭敏英)[1899~1932]은 1899년 10월 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정민영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7일 학교 부근인 재동(齋洞) 한광석(韓光錫)의 집에서 최중경(崔中庚)에게 청년동맹회가 제작한 「독립선언서」 33매 및 「우리 동포여!」라는 격문 20매를 받았다. 「우리 동포여!」라는 격문은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학교를 비교하여 조선 학생 차별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정민영은 청년동맹회와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운동 취지에 적극 공감하여 「독립선언서」 등을 서울 시내 곳곳에 배포하고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민영은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8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민영은 1932년 9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민영의 공적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