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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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吉相 |
영어공식명칭 | Jang Gilsa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경제인.
[개설]
장길상(張吉相)[1874~1936]은 1874년 장승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제강점기 경일은행의 은행장이자 대주주로 활동하였고 교남교육회 창립 및 신간회 등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장길상은 1912년 대구의 일본인 자본가들이 한국인 자본가를 끌어들여 선남상업은행을 설립할 때 자본을 투자하여 금융 자본가가 되었다. 장길상은 대구의 정재학(鄭在學) 중심의 대구은행 설립 때도 출자하였고 이후 자신의 형제들과 1920년 4월 자본금 200만 원으로 경일은행(慶一銀行)을 설립하였다. 경일은행은 대주주 250명에 총 4만 주의 주식을 발행하였다. 장길상이 약 7,300주를 보유하고, 동생 장직상이 약 2,500주를 소유하여 장씨 형제들이 총주식의 25%의 지분을 차지하였다. 장길상은 경일은행의 은행장을 역임하였고 1933년 10월 경일은행이 선남은행에 합병되고, 상호는 대구상공은행으로 변경되었다.
장길상은 1926년 6월 경상북도 농회 부회장, 1927년 4월 조선농회 통상의원을 지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넓은 토지를 지주제를 통하여 경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소유한 청도군 풍각면의 토지에서 소작인들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소작인들이 과도한 소작료에 맞서 풍각면 농사개량조합을 결성하여 장길상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로 하는 불경작동맹을 맺으며 저항하였다.
장길상은 1908년 3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창립에 참여하여 재무부장 겸 평의원 그리고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 1920년대 문화운동에 참여하여, 왜관청년회 설립에 200원을 기부하였다. 장씨 형제들에 따르면, 장직상은 장길상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1만 원의 자금을 보냈다고 한다.
1922년 초 대구의 유지들이 교남학교(嶠南學校)의 설립을 추진할 때 장길상이 20만 원, 동생 장직상과 장택상은 각 5만 원 등 모두 30만 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다. 1922년 5월 장길상은 조선교육협회에서 교육계에 공헌이 많은 사람으로 선정되어 은관과 은잔 한 벌씩을 받았다. 1924년 대구에 큰 수해가 났을 때 백미 10가마니를 기부하였고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의 형태로 창립된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장길상은 1936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