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90 |
---|---|
한자 | 禹丙基 |
영어공식명칭 | Woo Byeonggi |
이칭/별칭 | 월해(月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11월 10일 - 우병기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11월 - 우병기 조선문제시국연구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3월 5일 - 우병기 청진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10월 26일 - 우병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우병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상인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
학교|수학지 | 덕산학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배동 |
활동지 | 도쿄 - 일본 도쿄시 |
묘소 | 우병기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조선문제시국연구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우병기(禹丙基)[1903~1944]는 1903년 11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서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월해(月海)이다.
[활동 사항]
우병기는 1920년대 초 윤상태(尹相泰)가 달성군 월배면[현 달서구 상인동]에 세운 사립 덕산학교(德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東京]로 이주하여 양산제조업에 종사하였으며, 1939년 11월경부터 5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였다. 우병기 등은 1941년 8월까지 8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으며, 진천순모(鎭川淳模)[창씨명]·태원용(太原勇)·방산상봉(方山祥鳳)·봉곡태을(蜂谷台乙)·결성시백(結城時伯)·전윤필(全允弼) 등을 새로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모임에서는 주로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 문제와 통제경제 등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향후 시국 대책을 논의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재일 한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문제시국연구회 모임이 탄로나 우병기 등 여러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우병기는 1942년 3월 5일 함경북도 청진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0월 26일 복역 중 사망하였다.
[묘소]
우병기의 묘소는 달서구 상인동 대덕산 기슭의 단양우씨 선영에 있다. 2007년 10월 우병기 추모비가 월곡역사공원 안에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우병기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