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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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涇東 |
영어공식명칭 | Woo Gyeongdong |
이칭/별칭 | 우경동(禹經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9월 21일 - 우경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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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우경동 파리장서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0년 1월 23일 - 우경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우경동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상인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
거주|이주지 | 상인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우경동(禹涇東)[1876~1960]은 1876년 9월 2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파리장서 운동이 전개될 때 유림 대표로 참여하였다. 우경동(禹經東)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우경동은 기호학파 학맥인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의 유학자들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에 여러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우경동도 대구[달성] 유림 대표로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12일 성주의 송회근(宋晦根)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파리장서 운동의 전말이 발각되었으며, 이 일로 우경동도 일제 당국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우경동은 1960년 1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우경동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