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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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允出 |
영어공식명칭 | Na Yunchul |
이칭/별칭 | 나대장 |
분야 | 문화·교육/체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 나윤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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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나윤출 김천각희대회 우승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나윤출 제10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우승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나윤출 제3회 전조선씨름대회 우승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0월 1일 - 나윤출 대구 10월항쟁 참가 |
출생지 | 옥포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
학교|수학지 | 능인고등학교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북한 - 북한 |
성격 | 운동선수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일제강점기|제10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우승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씨름 선수.
[개설]
나윤출(羅允出)[1912~?]은 1912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씨름 선수로 이름을 알리고 씨름협회 설립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10월항쟁에 참여한 이후 월북하였다.
[활동 사항]
나윤출은 대구 능인고등학교 시절인 17세부터 38세까지 약 20년 넘게 조선 씨름계를 평정하였다. 나윤출이 활동하던 1930년대는 씨름의 근대화 작업이 전국 단위로 확산되던 시기로, 나윤출은 씨름에서 우승하여 도합 1,000마리 이상 소를 탈 정도로 타고난 씨름꾼이었다.
나윤출은 1934년 김천각희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씨름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 뒤 황해도, 평양, 마산 등지를 돌면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37년 단오절 황해도와 평양에서 치러진 전조선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나윤출은 지방대회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회에 참가하여 실력을 뽐냈다. 나윤출의 주특기는 허리꺾기였고, 1937년은 여러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전성기였다. 1937년 7월 2일과 3일 이틀간 조선중앙기독청년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제10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가 조선중앙기독청년회 뒷마당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약 90명의 씨름 선수가 참가하였는데 나윤출은 신포 출신 이성주를 세 번 연속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 동암체육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후원하여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3회 전조선씨름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1937년에 씨름 선수들은 씨름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는데, 나윤출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7월 20일 씨름협회에서 승단을 발표하였을 때 나윤출은 가장 높은 4단에 들어갔다.
광복 이후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10월항쟁이 일어나자 나윤출은 ‘나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나윤출의 직책은 대구인민위원회 보안대장이었다. 신문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나윤출은 “내 손에 죽은 경찰이 30명이나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군정이 10월항쟁에 참여한 가담자들을 체포하고 처형시키자 나윤출은 1946년 10월 29일 3·8선을 넘다가 경기도 포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46년 10월 30일 제1관구 경무총감부로 압송된 뒤 월북하였다.
나윤출은 『조선의 씨름』을 발간하여 북한 씨름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북한 체육계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저술 및 작품]
나윤출은 월북 이후 『조선의 씨름』[평양국립출판사, 1958]을 저술하여 북한 씨름을 체계화하고 북한 체육계 발전에도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