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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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永祐 |
영어공식명칭 | Kim Yeong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4월 15일 - 김영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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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1년 6월 - 김영우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7월 18일 - 김영우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김영우 만기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김영우 정오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김영우 대구노동공제회 위원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7월 16일 - 김영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영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묘소 | 김영우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구노동공제회 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영우(金永祐)[1885~1926]는 1885년 4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영우의 아버지는 김진만이고, 어머니는 서복이다. 4남 6녀 중 둘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영우는 약종상(藥種商)에 종사하던 중 1921년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부참사 황일청(黃一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봉천(奉天)으로 건너갔다. 봉천에서 황일청과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 김현수(金鉉守) 등과 만난 김영우는 황일청이 주장한 조선 독립의 당위와 필요성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에서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7일 김영우는 황일청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서류 100매와 보증서 100매를 전달받았고, 서울에 도착하여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안준(安浚)과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방법을 협의하였다. 4월 25일에는 탑골공원 근처 민갑식의 집에서 김현수로부터 일제의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한 용도로 다이너마이트 7개, 뇌관 8개, 도화선 11개 등을 전달받았다.
김영우는 서울의 견지동에 머물면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1921년 6월 29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었고, 1921년 7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만기 출소하였다.
김영우는 출소한 뒤 1924년 11월 박동주(朴東柱)·서학이(徐學伊) 등과 함께 대구역 하역노동자들을 결집하여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철도인부조합 결성에 착수하였다. 이어 1925년 봄에는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에 가입함으로써 무장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으로 운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김영우는 1926년 대구의 대표적인 노농운동 단체인 대구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7월 16일 사망하였다.
[묘소]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