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28 |
---|---|
한자 | 尹喧 |
영어공식명칭 | Yun Hwon |
이칭/별칭 | 차야(次野),백사(白沙),해흥군(海興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세욱 |
출생 시기/일시 | 1573년 - 윤훤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운훤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운훤 삼척부사 부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5년 - 윤훤 호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운훤 동래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운훤 경상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8년 7월 - 운훤 경상도관찰사 이임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운훤 동지의금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25년 - 운훤 평안도관찰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27년 - 윤훤 사망 |
출생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수학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부임|활동지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해평(海平)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대사간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윤훤(尹喧)[1573~1627]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희림(尹希琳)이고, 할아버지는 윤변(尹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부인은 대사헌 심의겸(沈義謙)의 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며, 아들은 윤순지(尹順之)·윤원지(尹元之)·윤징지(尹澄之)·윤의지(尹誼之)이다.
[활동 사항]
윤훤은 1573년(선조 6)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9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98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이후, 호조좌랑·부수찬·수찬·이조좌랑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4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다. 1605년에는 호성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1605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612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김직재(金直哉)를 후대한 일로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1617년부터 1618년 7월까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윤훤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 동래에서 온천욕을 마치고 소유정(小有亭)에 들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미리 나와 있다가 맞이하고 소유정에 제영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의금부사를 지냈고, 1625년에는 대사간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로 있으면서 항전하였으나 안이한 계책과 서얼과 상인들이 항전을 포기하면서 패주한 죄명으로 강화도에서 처형되고 효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