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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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應川 |
영어공식명칭 | Park Eungcheon |
이칭/별칭 | 혼중(渾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정의]
조선 전기 대구부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박응천(朴應川)[?~1581]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혼중(渾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상주목사 박임종(朴林宗)이고, 할아버지는 이조정랑 박조년(朴兆年)이다. 아버지는 지제교 박소(朴紹)이며, 어머니는 홍사부(洪士俯)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부인은 김희려(金希呂)의 딸 순천박씨(順天朴氏)이며, 아들은 박동현(朴東賢)·박동호(朴東豪)·박동로(朴東老)·박동준(朴東俊)·박동민(朴東民)·박동선(朴東善)이다. 동생은 박응순(朴應順)·박응남(朴應男)·박응복(朴應福)·박응인(朴應寅)이다.
[활동 사항]
박응천은 1543년(중종 38)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왕자사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태인현감을 거쳐 형조정랑·호조정랑·봉산군수·고양군수를 지냈다. 그 후 대구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이천부사·수원부사·광주목사·양주목사를 거쳐 군자감판관·군기시첨정·한성부서윤·예빈시부정·사재감정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박응천은 대구부사로 있을 때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 박충후(朴忠後)를 노비문적에서 빼내어 천역을 면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1564년(명종 19) 상량한 연경서원(硏經書院)의 터를 공전(公田)으로 바꾸어 주었고, 재목과 기와를 제공하여 대구부 유학의 산실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581년(선조 14) 9월에 사망하였다.
[묘소]
박응천의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응천은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